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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인간의 위대한 질문

미래목회연구소 느헤미야 2020-04-27 13:46:05

인간의 위대한 질문: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배철현. 인간의 위대한 질문: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파주: 21세기북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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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해서

저자 배철현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은 고대 오리엔트 문헌과 그 언어에 매료되어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세계 최초로 셈족어와 인도-이란어 고전문헌학을 동시에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기원전 6세기 다리우스 대왕이 세 가지 쐐기문자로 기록한 베히스툰비문의 독보적인 권위자이며, 구약성서가 쓰인 히브리어와 아람어, 신약성서가 쓰인 그리스어를 비롯해 다양한 고대 언어를 연구한 국내 유일무이한 고전문헌학자이다. 2003년부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그 종교들을 탄생시킨 고대 오리엔트 문명과 헬레니즘 문명을 가르치고 있다.


요약

영성의 시대

 

저자는 신앙의 세대(1-3세기)에서 믿음의 세대(4-20세기)를 거쳐 21세기를 영성의 세대라고 정의한다. 저자가 말하는 "영성"은 "탈교리"이다. 21세기는 교리의 틀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처음 종교를 접할 때에는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다가 교리가 가르쳐 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하나님을 배운다. 맨 마지막 단계는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이 단계에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신비'라고 부른다. 이 신비를 경험한 사람은 과거의 '나'와는 다른 전혀 다른 '나'로 변화한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뿜어내는 영향력을 종교에서는 카리스마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초점을 맞추어 독자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하는지를 말한다.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쫓아갈 수 없는 너무나 위에 계신 분의 말과 삶이었기에 예수님을 따라 살기를 지레 겁먹거나 조금 노력하다가 이내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그려낸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저자는 기독교의 교리는 예수님의 신적인 면을 강조하거나 지나치게 이론적이어서 성도가 그 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다른 공부를 해야하거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또 다른 교리를 만들어 내야하는 어패를 지적한다.

하나님은 정의 내릴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연질서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고, 사람들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교리적인 하나님의 정의는 그 교리를 만들어 낸 사람의 개인적인 신앙의 경험이지 모두가 공유해야만 하고, 모두가 같은 고백을 해야하는 표준이 될 수 없다. 예수님처럼 살아감으로 모두가 하나님을 경험해야한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말하고자하는 모든 요지를 다 정리하였다. 그리고 1장으로부터 14장까지는 교리적인 틀에서 이해했던 성경의 이해를 너머 그가 이해한 성경을 해석하고 기술한다. 그의 논조에 따르면, 이 또한 그의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이기에 교리적인 정답도 아닐 뿐 더러 모두가 동의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그의 영성일 뿐이다. 이제부터는 각 장에서 그가 이해한 예수님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때로는 장의 제목과 내용이 잘 맞아 떨어지지 않거나, 때로는 각 장의 머리말에 소개한 성경 구절에 대한 진지한 묵상과 주석이라기 보다는 마치 잠언으로서 그 말 자체에 대한 동의로 성경구절은 인용 수준에서 끝난 장도 있기는 하지만, 글쓰는 이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면 그 또한 살짝 넘길 수 있을 만큼 좋은 아이디를 주는 묵상들이다.

 

제 1장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 6:25-34)

 

저자는 이 말씀을 이해하면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마치 꽃을 보듯 자신의 인생을 제3자적으로 관조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면 자신을 비울 수 있고, 버릴 수 있다. 내가 집착하고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음식이 아니라 목숨이 중요하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음식의 문제에 집착한다. 그 이유는 인생을 3인칭으로 보지 않고, 항상 1인칭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를 3인칭으로 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시선을 나를 보는 것이다.

 

"콘템플라티오(묵상)는 '하늘 높이 날고 있는 독수리의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어보는 연습'이다. 그러므로 묵상이란 '내가 가고 잇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스스로 관찰자가 되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47쪽)

 

제2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는가?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눅 5:4-5)

 

권태에 빠진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영역이 미지의 세계이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말은 익숙한 삶의 환경으로부터 나를 끊어 내라는 말이다. 내가 규정 지은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이가 잡는 것은 남들과 같은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다. 저자는 무관심의 영역에도 역시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말한다. 관심을 두지 않는 영역은 단지 무관심의 영역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두렵기 때문에 배척하는 것이다. 무관심했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그 곳에 그물을 던지면, 남들이 모두 물고기를 잡을 때 사람을 낚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경계를 허무는 곳까지 가야, 드디어 나를 버리고 예수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에파나고'(ἐπανάγω)에 숨겨진 핵심 의미는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과감히 떠나는 일, 단절하는 행위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84일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지만 다른 어부들과 달리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 걸프 스트림으로 과함히 탈출했듯이, 예수는 시몬에게 다른 동료들처럼 해변에서 물고기를 잡는 일에서 탈출하라고 명령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 그리고 습관처럼 하는 일상생활이 행복하다고 착각한다. 그 생활이 자신에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신이나 창조적인 일을위한 첫걸은 익숙하고 편한 과거의 모든 것을 과감히 유기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63쪽)

 

제3장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장한 일이냐?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눅 6:31-35)

 

저자는 논리적인 물음에 대한 교리적인 대답을 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삶이든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의 이해대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라고 말한다. 원수와 친구가 되고 나와 관계 없는 사람에게 연민을 갖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내 이웃은 누구인지, 내가 선을 베풀어야하는 사람들은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들인지를 따지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다. 비록 그가 누구인지 장차 어떻게 될 사람인지 알지 못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선을 푸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그처럼 사는 사람이다.

 

제4장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 15:32)

 

용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에 감사하지 못한다. 오히려 불만족하며 늘 먼 곳으로 떠나려 한다. 작은 아들처럼 권력과 명예 그리고 돈이 삶의 우선이 될 때, 거기에는 경쟁과 질시, 그리고 그 것을 풀기 위한 극단적 쾌락이 따르게 된다. 그리고 소수만이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형은 돌아온 동생이 반갑지 않다. 큰 아들은 원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할 뿐 아니라 따르고 싶어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작은 아들을 보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정반대의 인간이 된다. 마음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경쟁심이 분출되어 이기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은 다르다. 돌아온 것 만으로도 얼마나 장하고 기특한가? 아버지의 품이란 대상의 자격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이다.

 

"용서(容恕)라는 한자에는 그 본랜 의미를 추적할만한 중요한 단서가 있다. 먼저 '얼굴/모습/몸가짐/그릇에 담다'라는 다양한 뜻을 가진 용(容)자의 모양은 '집'을 뜻하는 '갓머리(宀)'와 '계곡'을 뜻하는 '곡(谷)'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대상을 보고 그 대상을 조목조목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산과 계곡을 더 커다란 덮개로 씌우듯 그 모두를 품어내는 것이다." (87쪽)

 

제5장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 14:30-31)

 

저자는 믿음이라는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을 설명하면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우주질서에 맞게 자신의 삶의 결을 맞추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믿음은 상태가 아니라 살아가는 모양이라는 말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믿음의 있고 없음, 그리고 깊고 얕음을 측량하는 기준이 다를지는 몰라도, 저자는 믿음이 적은 사람은 초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초보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도덕적인 옳은 일을 하는데 급급하다. 그러나 믿음의 깊이가 깊어질 수록 시선을 '나'에서부터 '너'로 바꾸고, '우리'로 확장시킨다. 그 믿음으로 '나'가 변화되었다면 그 깊이가 더해갈 수록 공동체를 변화시킨다.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힘은 말과 삶이 한결 같음으로 보여주고 영향을 미치는 신앙이다.

 

"신앙이란 어떤 사람이나 이상적인 삶에 대한 신뢰이자 충성이다. 또한 지적이며 정신적인 활동이나 고백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내재된 일종의 덕이다. 말하잠녀 자신이 약속한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그것을 지조 있게 지키는 행위가 바로 신앙이다." (109쪽)

 

제6장 누가 너의 죄를 물었느냐?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0)

 

관습과 전통을 지킴으로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선하다 또는 그들보다 '나'가 뛰어나다는 것에서 스스로 위안을 받으려는 경향이 있다. 사회에 이미 만들어진 질서가 있고 그 법과 질서를 바탕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잣대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신격화해서 하나님처럼 심판하는 이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만들어 놓은 관습과 전통을 거부하셨다.

 

"(소설 주홍글씨의) 시민들은 이 불쌍하고 '더러운' 영혼들(여주인공 헤스터와 혼외 관계로 태어난 아기)을 보면서 자신들은 이들보다 선하고 깨끗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잠시나마 위선적인 우월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133쪽)

 

제7장 너는 입맞춤으로 나를 넘겨주려 하느냐?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눅 22:47-48)

 

이 장은 유다와 유다의 입맞춤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다며 영지주의 복음서 '유다복음'을 소개한다.

 

제8장 무엇이 진리인가?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요 18:37-38)

 

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진리와 예수님이 말하는 진리는 다르다. 저자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을 다음과 같이 풀어 말한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말하기 위해서 태어났고,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노라."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스토아 철학자 중의 하나와 같다고 생각했을 지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그리스 철학의 진리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저 너머의 것이지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삶에 개입해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는 이라는 것을 대조하며 진리를 저너머의 추상적인 명제에서 세상을 바꾸는 삶의 진리로 진리의 영역을 뒤바꾸어 놓으신 예수님을 이야기한다.

 

"진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우리를 지켜보는 초월주가 아니라, 인간 삶에 개입해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 과정으로서의 '믿음'이다." (191쪽)

 

제9장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저자는 이 부분에서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을 조명한다. 자신만의 숭고한 길을 찾아간 인간 예수가 가본적이 없는 불안한 길 앞에서 외치는 두려운 외침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이지만, 예수님은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걸었다. 그러므로 이 외침은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외침이 아니라, 그 어느 것보다도 숭고한 외침이다. 저자는 살아가면, 예수님의 숭고한 마지막 외침의 자리에 로마 군인들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숭고한 외침을 외치는 이들을 목격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감탄을 통해서 한 사람의 숭고함이 더 높아졌음을 이야기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온전히 발견하는 행위는 숭고하다. 숭고함은 개개인에게 유일하다. '침묵'에 등장하는 신부 로드리게스처럼 자신만의 숭고한 길을 스스로 찾아야한다. 이 숭고한 길은 그 누구도 가본 적이 없으므로 불안하고 두려운 여행이지만 숭고하기 때문에 갈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길이기도 하다." (202쪽)

 

제10장 네 안에 있는 신성을 왜 보지 못하느냐?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0-12)

 

저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야함"을 묻는 니고데모를 향해서 그 의미를 설명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풀이한다.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의 말은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의 경험을 통해 주어진 자아로부터 탈출하여 내 안의 신의 속성(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하고 이를 실천해야한다는 의미다." (234쪽)

 

제11장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0:29)

 

철학적인 궁금증(의심)과 질문, 그리고 지적인 물음 없이 예수를 믿는 것는 것은 종교인이 전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 종교인이 전한 예수님이 실제 예수님의 참 모습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목회자의 설교에 의존하여 그가 전하는 예수님의 마음 만을 예수님의 모습 전부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충고이다. 이 충고는 목회자들에 대한 도전이 아니다. 믿음과 신앙을 목회자들에게 모두 던져 놓고서 삶에서 아무런 변화도 원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도전이다. 기독교인들은 질문하고 스스로 그 대답을 찾아야한다. 우리가 가진 성경 역시 한 공동체의 기록이며, 그 기록이 예수님의 모든 모습을 다 설명해 준다고 말할 수 없는데, 하물며 듣고 읽은 말과 문자에 사로 잡혀서는 예수님의 참모습을 찾아갈 수 없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240쪽)

"오늘날 이 '근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르 설교하고 배운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믿는지, 자신들에게 설교한 종교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258쪽)

 

제12장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 20:15)

 

저자는 성경과 과학을 이원적으로 보려는 사람들은 과학과 고고학의 발전으로 인해 전통적인 신앙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도 여전히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이런 '근본주의'자들은 아직도 돌아가신 예수에 사로잡혀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격이다. 저자는 "나를 붙들지 마라"는 구절을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는 요구로 이해한다.

 

"먼저 동사 '하프투(손대다)'는 그 대상이 진자인지 가짜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손가락으로 '만지는' 행위가 아니다. 하프투는 '휘어잡다/쥐다'라는 의미로 대상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기 위해 손으로 적극적으로 휘어잡는 행위다... '메 무 하프투'(내게 손을 대지 마라)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라는 요구다." (276-277쪽)

 

제13장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2:1-4)

 

저자는 이 장에서 삼위일체 논쟁의 역사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과연 그것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과 어떤 깊은 상관이 있는지를 묻는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셨을까? 삼위일체 교리는 후대 철학자과 신학자들의 변증적인 논쟁일 뿐이다. 이 교리적인 논쟁으로 죽었던 사람들 그리고 고통받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보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마치 고민을 토로하는 사람에게 해답을 준다는 것이 또 다른 고민을 던져주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하나의 교리를 만들어 놓고 그 교리를 증명하기 위해서 또 다른 교리들을 만들던 역사는 실상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제14장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막 4:30)

 

구약 성경에서 천국은 "에덴동산"이며,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어 머무는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이 말이 신약 성경으로 와서는 '하늘나라' 또는 '하나님의 나라'라 불린 것이다. 하늘 나라라는 말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상태/이상적인 원칙이 통하는 상태'를 말한다. 저자는 천국은 일상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것들을 거룩하게, 큰 손님 모시듯, 하나님처럼 대하면 그 일상이 천국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차이는 어떤 눈, 어떤 귀로 세상을 보는가이다.

 

"예수는 제자들과 외부인들의 차이점을 시력과 청력에서 찾는다." (317쪽)

 

정리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다시한번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일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야하고, 말과 삶으로 그와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말한다. 이 책의 어투와 논조가 보수적인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거슬리는 곳이 군데군데 나타나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말', '삶', '일상'에서 만나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말'과 '삶'이 이루어지는 이 세상을 떠올리며, 잠시 교리를 무장해제하고 읽는다면 의외로 예수님과 좋은 만남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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