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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페인트

관리자 2019-09-23 23:5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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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배경은 미래 사회이다. 아이를 키워주는 양육 공동체 NC(National Center)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최첨단 양육 센터 NC에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과 이들을 보살피는 가드들이 살고 있다. 

    NC에는 훌륭한 방과 운동시설, 학교, VR룸, 똑똑하고 인격적인 가드 등, 아이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다. NC에서는 수시로 아이들의 영양 상태를 체크하고, 운동 시간과 좋은 교육을 제공한다. 아이들은 그야 말로 최고가 된다. 이 NC 시스템의 백미는 13세가 넘은 아이들이 부모를 직접 면접 본 뒤 자기 부모를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제목인 ‘페인트’는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을 뜻하는 소설 속 아이들의 은어이다. 

    아이들에게 ‘페인트’는 언제나 가장 뜨거운 화두이자 인생이 바뀔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다. 만약 좋은 부모를 만나서 NC를 떠나게 되면 ‘NC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완전히 지워지는 반면, 20세가 되도록 부모와 매칭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NC 출신이라는 이유로 편견에 시달리며 스스로 앞가림을 해 나가야 한다.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일까? 


“저는 쫙 빼입은 정장에 준비된 인사말을 외듯이 내뱉는 사람들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말할 때 아, 그래? 그럼 다른 걸 해 볼까? 말할 수 있는 부모를 원한다고요.” -93쪽 


소설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NC에 부모 면접을 신청한다. 그중에는 진심으로 자녀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NC에서 자녀를 입양할 경우 국가로부터 받게 되는 넉넉한 양육비와 연금을 고려해서 면접에 지원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아이를 입양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프리 포스터(부모 지원자)는 먼저 서류와 홀로그램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재산과 직업, 지원동기, 외모 등을 평가받고 심리검사에 임해서 안정된 정서를 증명해야 한다. 이후 가드의 주선을 통해 아이와 3차례 면접 시간을 가진 후, 한 달 간의 센터 합숙 기간을 거쳐 아이를 입양하게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아이들은 언제든지 ‘스톱’을 외칠 수 있다. 그러므로 프리 포스터들은 ‘건강하고 노련한 부모’로 보이기 위해 많은 공부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공부를 한다고 해서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프리 포스터들은 마치 육아 서적을 열심히 읽은 후에 자, 이만하면 아기를 낳아도 되겠어, 생각하는 사람 같지 않나요?”

“…….”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그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92쪽


자녀를 통한 대리만족: 하나의 어머니


‘하나’는 다른 프리 포스터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어른이다. 그녀는 부모 면접에 임하면서 자꾸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어른인지 증명해도 모자란 자리에서 “어머니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 내가 과연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어머니는 어린 하나가 커서 외교관이 되기를 바랐고, 하나에게 이런저런 외국어 공부를 시키려고 노력했다. 하나의 의견과 상관없이 그녀를 발레 교습소에 보내기도 했고, 온갖 공연에 데리고 다녔다. 그런 어머니 아래에서 하나는 불행함을 느꼈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꿈이고 목표다. 아무리 하나의 어머니가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 교육을 동경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어머니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158쪽


때로 우리는 ‘내 눈에 좋은 A’가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호의를 베푼답시고 ‘내 눈에 좋은 A’를 선물하고는 그가 나와 같이 A에 환호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가 강요로 바뀔 때, ‘내 눈에 좋은 A’는 폭력이 된다. 하나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린 딸에게 좋은 것을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좋은 것이었을 뿐, 어린 하나에게는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족쇄가 되었다. 

    결국 하나는 외교관이 되는 대신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어머니는 실망과 배신감에 휩싸였다.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하나가 자신의 바람을 알아주지 않자 거절감을 느낀 것이다.


노련한 지지자: 아키의 프리 포스터


14살 아키는 첫 번째 페인트에서 마음에 드는 부모를 만난다. 그들은 60대의 중년 부부로, 이미 장성하여 독립한 아들이 있는 ‘베테랑 부모’이기도 하다. 넉넉한 재산, 온화한 인품, 부부간 친밀한 관계. 아키의 프리 포스터는 나이가 많다는 것 외에는 완벽에 가까운 부모의 모습이다. 이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 사람을 잘 믿고 사랑 받는 경험이 필요한 아키를 품어주기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들은 아키를 만난 후 아키와 가까워지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모습을 보인다. 할머니는 머리를 검게 염색했고, 할아버지는 아키가 좋아하는 윈드 보드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키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묻고, 아키가 잘 따르는 제누에게도 따뜻한 관심을 보인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상대방을 초대하기보다, 상대방의 세계에 들어가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알콜 중독자: 박의 아버지


‘박’은 NC의 센터장이다. 냉철하고 꼼꼼한 성격을 지닌 박은 NC의 아이들 한명 한명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런 박을 두고 아이들은 박의 부모가 이성적인 원칙주의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박은 알콜중독자인 아버지 아래서 자란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 

    박의 아버지는 술에서 깨어나면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는 눈물로 호소하며 사과를 했지만 또다시 술에 손을 대고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 때문에 어머니와 누나, 박은 길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과거부터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는 왕왕 등장했다. 그들은 가부장적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  청소년을 억압하는 힘의 상징으로 자주 그려졌다. 이러한 인물이 소설이나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그만큼 현실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어른이 많다는 것을 반영한다. (소설은 현실과 인간의 본성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은 ‘지금-여기’의 청소년소설에도 여전히 등장하고 있다. 나아가 요즘에는 ‘힘과 억압의 상징’으로서의 어른에서 나아가 ‘병들고 왜곡된 자아’로서의 어른이 등장하기도 한다. 우울증에 걸린 엄마, 게임중독에 빠진 아빠, 심지어 성폭력 가해자인 ‘아는 어른’도 그려진다. 

    박의 아버지는 폭력의 주체임과 동시에 알콜중독에서 빠진 병든 인물이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고 돌보아야 하는 양육의 책임을 이행하기는커녕, 개인의 삶조차 추스르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한다. 이때 한 사람의 고통과 죄의 문제는 그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들에게도 어떻게든 영향을 미친다.


좌충우돌 친구 유형: 제누의 프리 포스터


NC에서 성장한 제누 301은 성숙하고 생각이 깊은 17세 소년이다. 입양을 통해 정부로부터 각종 복지 혜택을 받는 데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프리 포스터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다. 

    그런 제누 301에게 어느 날 30대 커플인 하나와 해오름이 나타난다. 보통의 프리 포스터와 달리 빈틈이 많은 그들은 부모 심리검사도 간신히 통과하고 수입이 많지도 않지만, 제누 301의 마음을 끄는 솔직함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첫 만남부터 자신들이 훌륭하기만 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고, 완벽한 인간도 아님을 오픈한다. 


“우리는 사실 예행연습도 없이 나왔어. 많이 두서없었지?”

남자가 사과했다.

“……대부분 예행연습 없이 부모가 되잖아요.” -109쪽


하나와 해오름에게는 ‘부모란 이런 것이다.’라고 할 만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반대로 ‘자녀는 이래야 한다.’는 기대도 없다. 그들에게 입양은 결혼과 똑같이 ‘남과 남이 만나서 가족을 이루는 일’이다.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할지는 앞으로 더욱 고민하며 깨달아가야 할 숙제이다.  


“부모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어. 너처럼 성숙한 열일곱 살 남자 아이의 부모 말이야. 그리고 해오름과 나는 생각했어.”

“…….”

“우리가 꼭 부모가 되어야 할까? 그냥 친구가 되면 안 될까? 십대들에게는 부모보다 친구가 더 소중하잖아. 부모에게 할 수 없는 말을 친구에게는 하잖아.” -162쪽 


제누 301은 부모 면접의 마지막 단계인 합숙생활 전에서 페인트를 멈춘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NC를 떠나기 전까지 어떤 페인트로 진행하지 않기로 한다. 하나와 해오름이 싫어서가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도 NC 출신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3차 부모 면접에서 하나가 선물한 제누 301의 초상화 뒤에는 하나와 해오름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그들은 정말 친구가 되기로 한 것이다. 


여전히 만들어가는 관계


현실의 청소년들에게 부모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물론 유년기와 달리 부모와 자녀 간의 사이가 급격히 멀어지는 시기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청소년들은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타인과 사귀어나가며, 부모의 지지와 훈육 아래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갖는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하지만 부모가 된다는 것, 자녀와 관계를 맺고 한 가정을 이루어가는 일은 말처럼 쉽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에, 때로는 자식을 나의 소유물로 착각하기도 하고, 내 맘 같지 않은 자녀들을 보며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부모들처럼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고통이나 죄의 문제로 가족 구성원을 괴롭힐 때도 있을 것이다. 하나와 해오름이 그랬듯이 ‘나 같은 사람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불안해하기도 한다. 

    『페인트』의 이희영 작가 또한 자신이 아내이자 엄마로서 한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돌아보는 와중에 이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찾아온 그 생명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부모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그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제누 301에 의하면 가족은 결혼과 출산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제와 헌신을 통해 되어져가는 것이다. 마치 교회처럼! 

    프리 포스터의 자리에 목회자를 두고, NC의 아이들의 자리에 교인을 둔다면 이 단순한 소설은 청소년 소설에서 리얼리티로 바뀐다. "어떤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인가?" 라는 질문에 "주님과의 깊이 있는 동행을 하는 영성의 목회자"라는 모범 답안을 잠시 제쳐두고 목회자와 교인들과의 "관계"라는 눈으로 본다면, 이 리뷰에서 인용한 대화들은 참 무겁다. 


“저는 쫙 빼입은 정장에 준비된 인사말을 외듯이 내뱉는 목회자들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말할 때 아, 그래? 그럼 이렇게 같이 해 볼까? 말할 수 있는 목회자를 원한다고요.”

“목회자들은 마치 육아 서적을 열심히 읽은 후에 자, 이만하면 아기를 낳아도 되겠어, 생각하는 사람 같지 않나요?”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꿈이고 목표다. 

“우리가 꼭 목회자처럼 무게를 잡아야할까? 그냥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의 길동무처럼 되면 안 될까? 십대들에게는 부모보다 친구가 더 소중하잖아. 부모에게 할 수 없는 말을 친구에게는 하잖아.”

“목회자와 교인과의 관계, 그건 권위로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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