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떨기나무

미래목회연구소 느헤미야 2019-07-17 23:29:47


떨기나무

김승학. 떨기나무. 서울:두란노, 2007.



저자에 대해서

저자에 대해서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한방주치의로 일하던 그는 시내산이 시나이반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디안 땅(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지금의 사우디 북부 아라비아)의 라오즈산이라는 가설을 접하고 6년 동안 12차례 북부 아라비아 탐험에 나섰다. 

그는 대구 보건대를 졸업하고 미합중국 재단법인 노아선교원을 수료했으며 중국 북경 국제 침구 연구소에서 연수 받았다. 사우디왕립병원 침구과와 뉴제다병원 침구과를 운영했고, 사우디 국왕과 각부 장관과 여러 명의 왕자들을 치료했으며, 16년 동안 메카 주지사(마지드 왕자) 주치의로 일했다. 외무장관 표창, 주 사우디아라비아 특명전권 대사 표창, 차드 공화국 영부인 표창 등을 받았다. 현재 수원 오목천감리교회 권사이며 주식회사 CSS. 코리아 파낙스의 부회장, FSW의 부회장이다. 그의 저서로는 『떨기나무』(두란노)가 있다.


요약

이 책을 쓴 김승학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주치의로 일하면서 론 와이어트 (Ron Wyatt. 저자는 책 내내 "론 와트" Ron Watt라고 하고 있으나, Ron Wyatt 임)의 동영상을 접하며, 사우디아라비아의 라오즈 산 (Jabal al-Lawz)을 성경의 시내 산으로 확신하며, 이 산을 찾아 떠난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 여행을 시작했을까? 제일 먼저 그가 밝힌 여행 시작의 동기는 저자의 아버지가 보여준 론 와이어트의 동영상이다. 그리고 책 내내 직접적으로 저자는 카톨릭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현재의 시내 산이 로마 교황청의 일방적인 결정이었으며, 학자들은 교황청의 주장을 무작정 따르려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잘 구성되었다.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생생한 언어로 구사하였기에 책을 읽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술술 잘 넘어간다. 중간 중간 론 와이어트의 동영상에서 본 흔적들을 찾아낼 때마다 얼마나 흥분했을지를 글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기행문이며, 기행문을 통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전제로 시내 산을 사우디아라비아의 라오즈 산이라고 확신한다. 저자가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밝히려는 근거들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기에 그것을 옮긴다. 


❖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이 진짜 시내산이 아닌 아홉가지 이유


1. 시나이 반도는 당시에 애굽의 땅이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고자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이집트 영토인 그곳으로 돌아가서 11개월을 살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2.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1967년에 발발한 6일전쟁에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40년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3.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반도를 지나기 3천여 전부터 '신(=시나)'라 불렸다. 

아카드의 신(神)인 '신'(sin)에서 이 산의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시나이 반도를 지나기 3,000여년 전부터 시나이 반도는 '신'이라고 불렸다. 


4.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은 기원후 527년 순례객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급조된 성지일 뿐이다. 

로마 교황청은 시내 산을 순례하고자하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못 이겨 기원후 52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현재 이집트 시나이 반도의 시내 산이라 불리는 Jebel Musa를 아무 근거도 없이 급조했다.  주후 5세기 이전에는 그 어느 기록에도 거기를 시내 산이라 부르거나 기록한 적이 없다. 


5. 출애굽해서 십계명을 받기까지 11개월 5일동안 애굽땅에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즈음에 출애굽해서 홍해를 건너고 엘림과 신 광야를 지나 시내 광야에 들어와서 십계명을 받고 떠날 때까지 기간은 정확히 11개월 5일이다. 


6. 이집트 왕자로서 애굽 땅을 잘 아는 모세가 이집트 군인들이 많은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갔을 리가 없다. 

구리와 터키석이 있는 광산에는 이집트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7. 시나이 반도는 르비딤과 호렙산 사이가 48km나 떨어져 있어 성경과 다르다. 

르비딤에 당도한 후 마실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 했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호렙 산 반석을 치라고 하셨다(출 17:6). 그렇다면 르비딤과 호렙 산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48km나 떨어져 있다. 


8. 시나이 반도의 무사산 앞에는 250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앉을 만한 광야가 없다. 

시나이 앞은 협곡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앉을 광야가 없다. 


9. 기존의 출애굽 경로에 의하면 홍해를 건널 필요가 없다. 

고센에서 무사 산까지는 육로로 올 수 있는 길이다. 


❖  진짜 시내산이 미디안 광야에 있는 8가지 이유


1.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땅으 예로부터 미디안 땅이라고 불려 왔다.

이 땅은 수천년 전부터 미디안이라 불렸다. 이 지역은 나바테아인이 살고 있는데, 한국어 성경 '느바욧'이 나바테아인이다.

2. 하나님은 구약 시대부터 이미 아라비아와 미디안에 관해서 명명백백하게 구분해 말씀하신다. 

구약 성경이든, 신약 성경이든 오래 전부터 이미 아라비아나 미디안, 그리고 이집트를 분명하게 표기하고 있다 (아라비아-왕상 10:15; 미디안-창25:2; 출 2:15)


3. 이집트 왕자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도망간 곳이 성경에 시나이가 아닌, 미디안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모세가 도망가서 40년 동안 시나이 반도에 살았다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4. 하나님음 모세에게 모세가 살고 있는 미디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출 3:12).


5. 홍해를 건너 그들이 수르 광양로 들어가 물을 찾아 사흘 길을 헤메대가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마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아라비아 홍해 변에 수르라는 족장이 이 땅을 소유하고 있어 그 지역을 수르 광야라 하며, 그는 미디안 사람이었고, 미디안은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민 25:15)


6.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분명히 아라비아 사람이고, 미디안 땅에 산다고 했지, 시나이에 산다고 한 적이 없다. 

이드로의 집터는 지금도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에 바드라고 불리는 곳에 있다. 이스트 테네시 주립대학 도서실의 지도에는 바드 옆에 이드로(Jethro)라 표시된 지도가 있다. 이슬람 경전에서는 모세의 장인을 이드로라고 명시해 놓았다. 바드에서 라오즈 산까지는 와디 무사를 따라 35km 떨어져있다.


7.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족과 전투를 별였다고 했는데, 아말렉 족은 미디안 광야 인근에 살던 아라비아인이다.


8. 사도 바울은 시내산의 위치를 아라비아에 있는 산으로 정확하게 기록했다 (행 7:29)



비평 서문 


이 책은 몇 년전 한국 교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책이다. 저자의 사회적인 위치, 그리고 이 책을 펴낸 출판사의 이름 때문에 그 내용의 신뢰를 받았었다. 지금도 이 책의 내용을 믿고 있는 이들이 있으며, 심지어 몇몇 작은 신학교에서는 론 와이어트의 비디오를 보기까지 한다. 


첫번째. 시내 산 논쟁 


시내 산의 위치에 대한 논쟁은 이미 너무 일반적이다. 첫번째로 시내 산이 헬랄 산(Jebel Helal)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Eissfeldt). 이 주장은 출애굽 초창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변길 Via Maris를 따라 나왔을 것이라는 전제에 근거한다. 두번째로 가데스에서 동남 쪽 55km정도 떨어진 카르콤 산(har Kardom)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Anati). 이 산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고대인들의 흔적들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세째로 신-비슐(Jebel Sin-Bisur)이 시내 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Harel). 이 주장은 비틸 호수(Bitter Lake, 홍해라고 번역된 지명의 다른 제안)를 통과한 이스라엘 백성이 수에즈 운하 남단에 위치한 아윤 무사(Ayun Musa, "모세의 샘")를 지나갔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네째로 아카바/에일랏 동쪽 15km 지점에 있는 요르단의 비길 산(Mt. Biggir)이 시내 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Beke, Lucas). 이들은 왕상 9:26; 갈 4:25를 근거로 삼는다. 다섯째로 아카바/에일랏에서 120km 남쪽의 라오즈 산(Jabal al-Lawaz)를 시내 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Blum, Cornuke, Halbrook). 네째 견해와 마찬가지로 왕상 9:26; 갈 4:25를 근거로 삼되, 하나님이 불로 현현했기에 산의 정상이 더 검은 산을 지목했다. 여섯째로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화산 지대에 있는 바들 산(Hala el-Badr)을 시내 산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Gressman, Musil, Koenig, Humphreys). 이 주장은 그곳이 활화산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사프사파 산(Ras Safsafah), 세르발 산(Jebel Serbal), 카타리나 산(Jebel Katarina) 등이 후보군에 들어오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출애굽의 여정에서 나오는 지역들의 이름만 있을 뿐, 어디인지가 고고학적으로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고, 출애굽의 여정 역시,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기억하고 있는 경로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두번째. 론 와이어트 


이 책의 저자가 밝히듯, 저자가 확신하는 라우즈 산 기행은 아버지를 통해서 본 론 와이어트의 동영상이 촉매제가 되었다. 저자는 론 와이어트를 탄압받는 복음주의자로 여기는 듯하다. 1999년에 사망한 론 와이어트는 테네시 Tennessee의 메디슨 Madison의 한 병원에서 일하던 마취과 간호사였으며, 제칠일 안식일교의 교인이다. 그는 터키의 두르피나르 Durupinar에서 찍힌 방주 모양을 하고 있는 지형의 사진 한 장을 보고 탐험을 시작한다. 이 탐험을 시작으로 자칭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자칭'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론 와이어트가 단 한번도 정식 고고학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에 고고학을 공부한 내력이 없다는 것부터가 그가 고고학 유물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른다는 증거가 된다. 론 와이어트가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노아의 방주, 방주의 데크 나무 조각, 방주의 닻으로 사용된 돌

2. 노아와 그의 아내의 무덤의 표식, 노아의 농장의 담장들, 노아가 쌓은 제단  

3. 모세가 율법을 기록한 동물 가죽  

4. 소돔과 고모라, 소알, 스보임, 그리고 아드마 

5. 이집트의 대가뭄 기간에 요셉이 건설한 곡식창고

6. 바벨탑(터키)

7.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의 위치 (아카바만)

8. 홍해 바다 아래에 가라 앉아 있는 이집트 파라오 군대의 병거 바퀴들과 그 외의 유물들 

9. 시내산 (Jabal al-Lawaz)

10. 법궤

11. 십계명 돌판 

12. 황금 송아지의 금조각

13. 골리앗의 칼

14. 예수의 무덤을 봉인한 돌 

15. 예수의 피


    이 정도가 되면, 론 와이어트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눈치챌 수 있다. 노아 방주의 나무 조각, 모세가 율법을 기록한 동물 가죽의 조각, 바벨탑, 법궤, 십계명 돌판, 황금 송아지의 금조각, 골리앗의 칼, 예수의 무덤을 봉인한 돌, 예수의 피 등 그냥 내어 놓는다면 간단한 검사 만으로도 진위를 가릴 수 있겠지만, 발견했다는 주장만 있을 뿐 증거가 없으므로 분석도 할 수 없다. 단지 그들이 분석했다는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가 시작한 여행의 근거가 신빙성이 없다. 

    이런 책에 일일이 평가를 내린다는 것이 매우 소모적인 일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이 한국에서 가지는 영향력을 비추어 한번쯤은 해 볼만하다. 여기에서는 그가 쌓여진 돌을 보고, "저것이 시내 산 아래에 만든 제단이구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예로 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듣고는 바윗가의 구멍난 돌을 보며 "이것이 모세가 제사를 드린 바위구나!" 하며 찍어 놓은 사진들과 같은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가치도 없으므로 비평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의 영역이나 사실의 영역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우기기'이기 때문이다. 이 비평에서는 위에 저자가 제시한 근거들 17가지와 고고학적으로 판단해 보암직한 것들을 중심으로 비평하겠다. 


비평 본론 [1]: 저자가 제시한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이 진짜 시내산이 아닌 아홉가지 이유와 진짜 시내산이 미디안 광야에 있어야하는 여덟가지 이유


저자가 제시한 "시나이 반도의 시내 산이 진짜 시내 산이 아닌 아홉가지 이유"에 대해서 짧게 비평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이 진짜 시내산이 아닌 아홉가지 이유에 대한 비평


1. 시나이 반도는 당시에 애굽의 땅이었다. 

이집트의 경계를 어디라고 확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이집트의 경계는 시나이 반도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나, 이사야의 시대(기원전 8세기)에는 나할 미쯔라임[Wadi El-Arish]을 기준으로 유다와 이집트의 경계를 삼았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가 되면, 시나이 반도 전체는 아라비아 땅으로 불린다. 

    출애굽 시대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신왕국 시대에 시나이 반도 남서쪽에 구리 광산들이 발굴되었고, 로마 시대까지 사용한 흔적으로 찾았으나,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역일 뿐, 그 곳이 이집트는 아니었다. 


2.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1967년에 발발한 6일전쟁에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1982년에 이집트로 이 반도를 다시 반환한다. 점령했던 대략 15년 동안 시나이 반도는 민감한 군사 분쟁 지역이었으므로 고고학 발굴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15년 동안 발굴을 계획적/체계적/대규모로 할 수도 없다. 


3.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 반도를 지나기 3천여 전부터 '신(=시나)'라 불렸다. 

시나이 반도의 어원이 달의 신(Sin)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시나이 반도의 산이 시나이 산(시내 산)이 아니라는 증거라는 저자의 주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4. 시나이 반도의 시내산은 기원후 527년 순례객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급조된 성지일 뿐이다. 

저자가 말한대로, 기원후 52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현재 이집트 시나이 반도의 시내 산이라 불리는 Jebel Musa에 성 캐서린 수도원 (St. Catherine Monastery)를 건설하였다.  기독교 역사에서 성 캐서린 수도원 지역을 중심으로 광야의 수도자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3세기 부터였다. 이들은 '모세의 떨기 나무'라고 불리는 곳을 중심으로 광야에서 은둔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이었다.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327CE에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묘 교회(Holy Sepulchre))를 세우기 시작할 때, Jebel Musa에서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사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모세의 떨기 나무가 있는 Jebel Musa에 수도원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여서 330CE부터 수도원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당시는 서방교회(로마 카톨릭)와 동방교회(정교회)가 나뉘어 지기 이전이었다. 

    적어도 기독교 사회에서는 기원후 3세기 부터 자발적인 광야의 수도자들이 '모세의 떨기 나무'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이후 그곳에 수도원 건물이 세워졌으니, 아무 근거 없이 그 산을 로마의 교황청에서 시내 산으로 급조했다는 말은 가치가 없다.


5. 출애굽해서 십계명을 받기까지 11개월 5일동안 이집트 땅에 있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1번의 설명으로 대치한다.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의 땅이 아니라, 이집트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변방이었다. 


6. 이집트 왕자로서 애굽 땅을 잘 아는 모세가 이집트 군인들이 많은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갔을 리가 없다. 

구리와 터키석이 있는 광산의 채광은 일년에 4개월 정도이며, 그 곳의 노동력을 보호하는 대규모의 이집트 군인들은 4개월 정도 주둔했을 것이다. 그 이외에는 최소의 군대가 그곳에 주둔했을 것이다. 

    출애굽의 시대를 15세기로 보는 입장에서는 신왕국의 18왕조의 강력한 권력이 시나이 반도 곳곳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학자들로부터 가장 선호받는 13세기 출애굽 설에 따르면, 약화된 이집트의 영향력이 시나이 반도에까지 미치기가 힘들었다. 


7. 시나이 반도는 르비딤과 호렙산 사이가 48km나 떨어져 있어 성경과 다르다. 

르비딤에 당도한 후 마실 물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 했는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호렙 산 반석을 치라고 하셨다(출 17:6). 그렇다면 르비딤과 호렙 산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출 17:7에서는 물로 다툼이 있었던 장소를 "맛사"또는 "므리바"라고 불렀다. 그리고 출19:2에서는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 저자는 임의대로 '맛사=므리바=르비딤'이라고 상정하고 있다.   


8. 시나이 반도의 무사산 앞에는 250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앉을 만한 광야가 없다. 

Jabal Musa로 부터대 대략 3.5km 떨어진 곳에는 넓은 장소가 있다. 그래서 일군의 학자들은 사프사파 산(Ras Safsafah)가 시내 산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을 꼭 평지에만 쳐야하는가? 평지에 치면 얻게 되는 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꼭 평지에만 진을 쳐야할 이유는 없다. 진을 쳤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여호수아의 마지막 연설에 세겜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 역시 평지가 아닌, 에발 산과 그리심 산에 섰다는 것을 기억해 보라. 


9. 기존의 출애굽 경로에 의하면 홍해를 건널 필요가 없다. 

굳이 따지면, 그 경로로 라오즈 산을 간다 치면 육로로도 갈 수 있다. 


❖  진짜 시내산이 미디안 광야에 있는 8가지 이유에 대한 비평 


1.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땅으 예로부터 미디안 땅이라고 불려 왔다.

이 땅은 수천년 전부터 미디안이라 불렸다. 이 지역은 나바테아인이 살고 있는데, 한국어 성경 '느바욧'이 나바테아인이다.

시내 산이 꼭 미디안 광야에 있을 필요는 없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출 3:1) 미디안 광야의 서쪽으로 갔다가 시내 산에 이르는 장면이다. 지도로 보자면, 현재의 시내 산(Jabal Musa)이 미디안 광야의 서쪽에 있다. 꼭 미디안 광야 안에 시내 산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시내 산의 위치 규명과는 큰 상관이 없는 내용이지만, 나바테아인은 이스마엘 아들 중의 하나인 느바욧의 후손들이다는 저자의 주장(254쪽)도 옳지 않다. 나바테아인은 지중해 동쪽 서아시아 지역으로 헬레니즘 문화가 유입될 당시, 알렉산더의 군대 장군 안티고누스와 싸운 전쟁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 한다. 이들은 느바욧과는 관계가 없다. 나바테아인이 북서셈어족(히브리어도 북서셈어족에 속함)의 일원일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에서는 이들이 그두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바테아(nbt)와 느바욧(nby)은 한글 어감 만이 비슷할 뿐, 언어학적으로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둘 간의 언어적인 연계성을 찾을 수 없다. 


2. 하나님은 구약 시대부터 이미 아라비아와 미디안에 관해서 명명백백하게 구분해 말씀하신다. 

구약 성경이든, 신약 성경이든 오래 전부터 이미 아라비아나 미디안, 그리고 이집트를 분명하게 표기하고 있다 (아라비아-왕상 10:15; 미디안-창25:2; 출 2:15)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왜 시내 산이 미디안 광야에 있는 이유가 될까?


3. 이집트 왕자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도망간 곳이 성경에 시나이가 아닌, 미디안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모세가 도망가서 40년 동안 미디안 땅에 살았다는 것과 시내 산이 미디안에 있는 것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덧붙여서 미디안 사람들은 한 곳에 정착하여 문명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아니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오가며 유목 또는 대상(隊商)일을 하던 사람들이다.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 집의 사위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모세의 활동 반경이 미디안 광야에 제한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미디안적이지 않다. 


4.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가 살고 있는 미디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출 3:12).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출 3:1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 구절에서 "나는 이 산, 시내 산이 미디안 땅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디안 땅으로 백성들을 이끌라고 명령하셨다고 이해한다."라고 말한다면, 그저 저자의 주장으로 받아들이겠으나, 시내 산이 미디안에 있다는 증거로 이 구절을 내밀며, 하나님이 모세에게 미디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5. 홍해를 건너 그들이 수르 광야로 들어가 물을 찾아 사흘 길을 헤메대가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마시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아라비아 홍해 변에 수르라는 족장이 이 땅을 소유하고 있어 그 지역을 수르 광야라 하며, 그는 미디안 사람이었고, 미디안은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민 25:15).

결국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거쳐간 수르 광야가 미디안 땅에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한글 성경만 읽으며 생긴 오독이 있다(117쪽).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שׁור)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 15:22)

죽임을 당한 미디안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이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צור)는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이었더라 (민 25:15)


    저자는 홍해 바다를 건너 당도한 수르 광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수르 광야가 미디안 땅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민수기 25:15를 제시한다. 미디안 사람 수르의 이름을 따서 그가 살던 지역을 수르로, 그리고 그가 살던 지역의 광야를 수르 광야라고 불렀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에서 수르(שׁור 슈르)는 미디안 사람 수르(צור 쭈르)와 한글로 표기를 같이 했을 뿐, 다른 어근과 다른 발음을 가지고 있다.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수르는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로부터 침입해 오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이집트 동부 델타 지역에 만든 일련의 요새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동시에 로마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국경선의 개념이다. 여러모로 민수기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수르 광야의 위치는 이집트 역사 기록에 엄연히 구체적으로  시나이 반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6.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분명히 아라비아 사람이고, 미디안 땅에 산다고 했지, 시나이에 산다고 한 적이 없다. 

말하건데, 성경에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아라비아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드로는 미디안 사람이다. 저자는 이드로의 집터는 지금도 사우디아라비아 북서쪽에 바드라고 불리는 곳에 있으며,  이스트 테네시 주립대학 도서실의 지도에는 바드 옆에 이드로(Jethro)라 표시된 지도가 있다며 그 집의 정확성을 이야기한다.

    이것 뿐 아니라, 현재의 지명에 남아 있는 모세의 흔적들, 와디 무사(Wadi Musa 모세 건천/물길), 에인 무사 (Ein Musa 모세의 샘), 등등 저자는 책의 전체에서 현재 남았는 지명에 녹아 있는 모세(아랍어로 '무사')의 이름들을 들으며 자신이 여행하고 있는 지역이 시내 산임을 확신한다. 지명은 전통에 근거하며, 전통은 때로는 역사적인 사실과 무관하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을 반영하기도 한다. 더군다가 기원후 7세기에 생겨난 종교인 이슬람의 성경 이해의 전통은 성경 그 자체 보다도 훨씬 후대의 것이다. 기독교와 유대교가 공유하고 있는 성경 이야기들이 꾸란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구체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은 꾸란의 내용을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과 그 해석에서 차용하는 이슬람의 특성을 이해해야한다. 분명히 출애굽기에서 말하는 모세의 전통은 미디안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슬람이 존경하는 예언자 모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명을 만든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예를 들어서 꾸란의 전통에 의하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왔고,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 그래서 현재 팔레스타인의 여리고 남쪽에는 "나비 무사" (Nabi Musa) 라고 하는 지역이 있다. 아랍어를 그대로 해석하건데, "예언자 모세"라는 지명인데, 현재도 무슬림들은 모세가 죽은 그 장소에 묻히고자 무덤을 쓰는 지역으로 선호하는 곳이다. 나비 무사에 가보면, 그 주변에 셀 수 없이 많은 무슬림들의 묘가 있다. 그럼 그 유대 광야 한 복판이 느보 산의 언덕 맨 위 봉우리(비스가)이던가? 지명이 역사를 추론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고, 역사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인 증거물들이 있어야한다. 그냥 저자 그렇게 생각한다는 신념이 아니라.


7.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족과 전투를 별였다고 했는데, 아말렉 족은 미디안 광야 인근에 살던 아라비아인이다.

구약 시대의 아말렉 사람들이 아라비아 사람들이라는 것을 성경을 바탕으로 고고학 증거물로 증명하면 당장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


8. 사도 바울은 시내산의 위치를 아라비아에 있는 산으로 정확하게 기록했다 (행 7:29)

저자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시내 산은 아라비아에 있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1-26) 


그럼, "바울의 시대에 아라비아라고 부르던 지역이 오늘의 사우디아라비아일까?"라는 질문을 해야한다. 바울의 시대에는 '아라비아'라고 부르던 지역은 시나이 반도를 포함한, 현재의 시리아,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전역을 부르던 명칭이었다. 제2차 성전 시대에 그리스어로 기록한 구약성경(LXX)에서도 창 46:25의 고센 땅을 "아라비아의 고센 땅"이라고 표기하였다. 즉 이집트 본토를 기준으로 고센 땅부터 서쪽 지역을 아라비아로 불렀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지명에 충실해서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낼 당시에 부르던 아라비아를 사우디아라비아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비평 본론 [2]: 그 외에 저자가 제시한 시내산이 미디안 광야에 있다는 근거로 내어 놓은 주장들 


1. 라오즈 산 주변의 돌에 그려진 끈이 풀린 신발, 그리고 뱀 모양의 지팡이 (69,72쪽) 

저자는 69페이지와 72페이지에는 돌 위에 그려진 끈이 풀린 신발과 뱀 모양을 소개한다. 그리고는 이것이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신을 벗었던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를 뱀으로 변한 사건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가 주장하는 그 그림들은 기원전 13-12세기에 사용되던 전형적인 고대의 가나안 문자(Proto-Canaanite Inscription)이다. 이 문자들은 아직 그 뜻과 발음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의 텔 아벡(Tel Aphek)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이즈벳 자르타(Izbet Zartah, 성경의 에벤에셀로 추정되는 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글자가 발견되었으며, 시내 산 (Jabal Musa) 남서쪽 세라빗 엘 카뎀(Serabit el-Khadem)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의 글자들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글자의 형태를  “시나이식 표기의 원형” Proto-Sinaitic letters 이라고 말한다. 저자가 쓴 책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문자라고 볼 수 있다. 


2. 솔로몬이 세운 홍해 횡단 기념 기둥 (234쪽)

저자가 제시한 솔로몬이 세운 홍해 횡단 기념 기둥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마시대 또는 비잔틴 시대의 것이다. 그리고 기념물로 세워진 기둥이 아니라, 그 위에 기둥 머리(capital)를 얹을 수 있는 건축물의 일부이다. 

    구약 시대의 기둥을 받치는 둥근 모양의 기초석들은 매우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정작 둥글게 깎은 기둥은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고대 건축물의 기둥들이 나무로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발견되는 솔로몬 시대의 건물들은 기둥이 없는 건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성경에서처럼 성전의 앞에 두개의 기둥이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솔로몬 시대와 그 이후인 구약 시대에 발견된 이스라엘의 기둥 머리는 모두 사각형이다. 즉, 사각형의 돌들을 쌓아 올린 형태의 기둥들이었다는 것이다. 

    하나의 돌을 깎아서 기둥을 만드는 것은 매우 후대의 일이며, 화강암 한 덩어리를 깎아서 둥근 기둥을 만드는 형태가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3세기 이후 부터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홍해 횡단 기념 기둥이라고 제시하는 기둥이 솔로몬의 기념 기둥일 수 없다. 


3. 이스라엘 백성의 성막터 (140쪽) 

과연 삼천 이백년 전의 성막 터를 이루는 돌기초들이 저리 깨끗하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또 그 성막이 돌로 쌓였다는 것은 성경의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궁금하다. 그가 말한대로,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주장은 아무리 분명한 것 같더라도 믿거나 따르지 말아야 한다."던 패기를 저자가 제시한 사진이 다 뒤집고 있다. 성막은 천과 가죽으로 만들어 졌다. 


4. 미디안 사람들의 토기 조각 (170쪽)

사실 글의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게 미디안 사람들이 사용하였다던 토기 조각 한 개의 사진이 등장한다. 미디안 광야 사람들이 살던 지역에서 발굴 되었으니, 미디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토기 조각이었다고 말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토기의 문양과 모양은 비잔틴 시대 또는 무슬림 시대의 특징적인 장식이다. 분명한 것은 출애굽 시기(후기 청동기)와는 맞지 않다.


5. 애굽 군인과 마차 바위 그림 (362쪽) 

사람이 말 등에 올라타서 다니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세기이다. 이집트의 군인이 홍해를 건너려는 이스라엘을 쫓아와서 죽이려는 장면이라고 소개한 암각화에는 고대의 전차를 그리는 형태와는 달리 활쏘는 이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해 쏘고 있고, 심지어 앞선 말에는 말 등위에 사람이 타고 있다. 그러므로 이 암각화는 기원전 8세기 이후에 새겨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6.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었던 장소에 그들에 그려 놓은 일곱촛대와 타무딕 (388-89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때 그곳에 머물렀다고 주장하며, 그들이 새겨 놓았을 것이라고 주장한 둥근 모양의 메노라의 모양은 전형적인 제2차 성전시대의 촛대 문양이다. 이 메노라 문양이 새겨진 가장 오래된 고고학 유물은 기원전 1세기 하스모니안 왕조의 안타고누스 2세(Antigonus II Mattathias, 40-37BCE)의 동전이다. 이 외에도 제2차 성전시대라 불리는 하스모니안 시대, 헤롯 시대의 무덤과 부조, 그리고 그림에서 저자가 제시한 메노라 문양이 발견된다. 그리고 제2차 성전 시대를 끝낸 로마의 티투스 장군의 개선문에 메노라가 장식되어 있는데, 같은 문양이다. 

    사진에서는 저자가 보았다는 고대 히브리어는 찾을 수 없었으며, 또 고대 아랍어 비문인 타무딕은 기원전 3-4세기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기에(아무리 빨라야 기원전 8세기) 여러 정황상 출애굽과는 관계가 없다. 


총평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성경에 대해서 얼마나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수 있다. 게다가 평신도인 저자가 살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 땅이 성경의 미디안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과장된 것이 아니라면, 가족의 안전을 담보로 론 와이어트 여행을 떠나는 저자를 머리 속에 그리면서, "저러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어쩌려구."하는 생각에 조마조마하게 읽어 나갔다. 가족들 모두가 안전하게 한국 땅에서 살고 있다하니, 이 책을 읽으면 제일 감사한 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잘못된 정보를 만났을 때, 어떻게 편협해지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해 지는지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저자 스스로가 밝히듯, 그는 고고학자도 아니고, 성서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다. 다만, 이 분야에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 론 와이어트라는 이의 유튜브에 감동을 받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던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신앙서적 부문에서 영향력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출판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비판을 받아야하는 것은 오히려 거짓 정보를 제공한 론 와이어트와 내용의 검증을 철저하게 하지 못한 두란노 출판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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