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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한 말씀만 하소서

미래목회연구소 느헤미야 2020-07-07 01:29:12

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서울: 세계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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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대해서

1931년 경기도 개풍군(現 황해북도)에서 태어났다. 교육열이 강한 어머니에 손에 이끌려 서울로 와, 숙명여고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의 발발로 학교를 그만두고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근무했다. 1953년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고, 마흔이 되던 1970년, 전쟁의 상흔과 PX에서 만난 화가 박수근과의 교감을 토대로 쓴 『나목』이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2011년 1월, 담낭암으로 타계하기까지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며 40여 년간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소설을 포함, 동화, 산문집, 콩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요약

「한 말씀만 하소서」는 작가가 남편을 먼저 보낸 후, 몇 달 되지 않아 자녀 중 하나 밖에 없는 아들까지 교통사고로 잃어 버린 후, 통곡과 절규의 심정을 쏟아낸 일기이다.

작가는 섬세하고 솔직한 문체로 있는 그대로의 자기 감정을 글자로 옮겨 놓았다. 그러므로 작가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이 책에서 기대하면 크게 실망한다. 집착할 정도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작가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엘리트 지향적인 생각과 삶을 거름종이 없이 드러내보인다. 반성적인 자기 표현인지 아니면 자신이 가진 생각이 옳다는 확신으로 내뱉은 말인지 판단을 하기 힘들정도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쏟아놓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고통(작가는 줄곧 이 고통을 참척 慘慽 의 고통이라고 묘사한다)과 인간의 가장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절규를 있는 그대로 토해내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하고, 하나님에게 답을 구하기도 하며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자기를 그려낸다.

 

■ 잊혀진 아들의 기억에 아파하는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함께 작가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죽어버린 아들이 없어도 행복해 하는 사람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내 아들은 이 세상에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 내 기억력말고는 아들이 존재했었다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세상이 도무지 낯설고 싫다." (50쪽)

"내 아들이 없는데도 온 세상이 살판난 것처럼 들서 있는 올림픽의 축제 분위기가 참을 수 없더니, 내 아들이 없는 세상 차라리 망해버리길 바란 거나 아니었을까. 내 무의식을 엿본 것 같아 섬뜩했다."(57쪽)

작가는 번번히 딸네 집의 베란다에서 자살을 꿈꾼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아들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보다 더 크다는 것을 정직하게 말한다.

"딸네 아파트는 13층이다. 베란다엔 새시도 없다. 순간적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기회는 당장 발 밑에도 있다."(43쪽)

"베란다로 나가본다. 13층이다. 뛰어내릴 용기가 없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뛰어내리기를 꿈꾼다. 베란다에 새시가 없어 더욱 발 밑이 가깝게 느껴진다."(87쪽)

 

■ 교인들의 말에 상처 받는 어머니

작가는 깊은 신앙의 세계를 품고 사는 이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가 느꼈던 신앙인들 사이의 대화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신앙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큰 상처를 줄 수 있다.

"(음식을 준비해 조용히 방문한 딸의 친구가 좋아 보였던 작가에게 딸이 소개하는 그 친구는) 좋은 학교 나와 출세하고 경제적으로도 유복하게 산다고 했다. 또 그 형제 자매들이 낳은 손자녀까지 합치면 그의 양친이 퍼뜨린 직게 가족이 50명 가까운데 여직껏 한번도 참척을 겪은 일이 없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듣기가 좋았는데, 그 집안이 그렇게 잘되는 것은 그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과 끊임없는 기도생활 덕분이라는 것을 자손들의 느끼고 늘 감사하며 산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마음이 몸시 상하고 말핬다. 상한 정도가 아니라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기분이었다. 딸도 들은 대로 말했을 뿐 그 한마디가 에미를 그토록 아프게한 줄은 미처 몰랐으리라. 나는 그럼 기도가 모자라서 아들을 잃었단 말인가. 꼭 그렇게 들려서 고깝고 야속했다. 세상에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에미가 어디 있단 말인가."(67쪽)

어떤 상황도 위로가 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쉽게 상처받으며 아파하는 작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얻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 발버둥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애걸해서 안되면, 따지고 덤비고 쥐어 뜯고 사생결단을 하리라. 나는 방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몸부림을 쳤다. 방안을 헤매며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마침내 하나의 작은 돌멩이가 되었다. 돌멩이처럼 보잘것없었고, 돌멩이처럼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지려고 기르 쓰듯이 한 말씀을 얻어내래고 기를 썼다.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질리 없듯이 한 말씀은 새벽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절한 밤이었다." (109쪽)

 

■ 하나님을 저주하는 어머니

극심한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신앙의 깊이를 떠나 극심한 고통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고, 침묵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저주하것은 살기 위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작가의 글에는 욥의 절규가 묻어 난다.

"그저 만만한 건 신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돼." (56쪽)

"예수께서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기 직전에 큰 소리로 남기신 말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기록하고 그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작 숨은 뜻은 "하나님, 하나님, 결국 당신은 안 계셨군요?"가 아닐까?" (79쪽)

""(기도를 한후) 주님,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믿어서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계실까 봐, 계셔서 남은 내 식구 중 누군가를 또 탐내실까 봐 무서워서 바치는 기도입니다"라고 내 기도에다 주석을 달았다. 주를 믿어서도 사랑해서도 아닌, 단지 공포 때문에 올리는 기도란 얼마나 참담한가. 참단 그 자체 그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82쪽)

 

■ 위로가 아니라 갑작스레 주시는 말씀

마리로사 수녀는 작가가 극도로 감정적일 때 될 수 있는 대로 이성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과 계획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세상문물 중 단 한가지라도 부로안전하게 만든 것이 없는 창조주가 어떻게 당신을 닮게 존엄하게 만든 인간의 문제를 불왕전하게 내버려두겠는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잡한 삶의 방정식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은 방정식은 불완전한 거고 반드시 해답이 있을 것이다.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라도 내세는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수녀님의 대답의 요지였다." (124쪽)

그러나 마리로사 수녀의 말은 작가에게 수녀답다는 생각은 들게 하였을지언정, 현재 고통을 넘어서는데 도움이 되거나 답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중, 어린 수녀가 자기를 찾아온 친구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작가는 고통을 뛰어 넘을 실마리를 찾는다.

"그 중 어린 수녀님이 속세의 친구에게 하는 소리가 문득 내 관심을 끌었다.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 얘기였다. 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비관도 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엔 속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되란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관대...'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이 되더라고 했다. '왜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와 '왜 내 동생이라고 저러면 안되나?'는 간발의 차이 같지만 실은 사고의 대전환이 아닌가. 나는 신선한 놀라움으로 그 예비 수녀님을 다시 바라보았다. 내 막내딸보다도 앳돼 보이는 수녀님이었다. 저 나이에 어쩌면 그런 유연한 사고를 할 수가 있었을가?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 (130쪽)

이런 마음은 작가가 기거하고 있던 수녀원의 수녀들에 대한 긍정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부엌에선 수녀님 둘이서 부침질을 하고 있는데 닫힌 방이 열리면서 복스럽게 생긴 젊은 수녀님이 변기를 들고 나왔다. 방금 받아낸 것 같은 질펀한 다량의 똥오줌이었다. 세상에, 이상도 하지.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얼굴로 남의 똥을 칠 수 있을가. 꼭 꽃병이라도 들고 나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 버림받은 노인으로 하여금 이 집에서 한 송이 꽃을 피우듯이 똥을 쌀 수 있는 황홀한 말년을 누리도록 저 수녀님은 여기 있는가?... 여기 이렇게 의탁해 있으면서도 여기가 전혀 딴 세상처럼 보이는 것은 여기에는 내가 여직껏 생각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롱누 사랑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116쪽)

"신에 대한 내 물음은 딱 한 가지였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그렇게 크게 잘못했기에 이런 무서운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포악이요 항의였다. 그러니까 내가 신의 부당함을 항의하고 내가 억울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나는 그닥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죄가 있다면 어디 말해보시지 하는 신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었다. 십자가 밑에서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구해도 얻어낼 수 없었던 응답이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고 앉았을 때 들려올 게 뭐였을까? 그때 계시처럼 떠오른 나의 죄는 이러했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그 순간만은 그건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정답이었다. 그리고 구원이었다."(140-143쪽)

즉, 갑작스럽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미 그 마음이 싹을 틔울 수 있는 하나님의 환경 조성이 있었던 것이다.

"송별연에 나와준 수녀님들 중에는 조 테레사 수녀도 끼여 있었다. 그는 착해 보인다는 것말곤느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수녀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특별한 수녀였다. '하필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 하는 원망으로 똘똘 뭉친 내 마음에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되는가?'라는 당돌한 반문을 불러일이킨 수녀였다. 그는 알까. 그가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내 딱딱한 마음에 일으킨 최초의 균열에 대해." (161쪽)

 

■ 정리하면서

작가의 절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오늘 교인들의 절규이기도 하다. 신앙의 깊이와 교육의 수준, 그리고 사회적인 위치와 관계없이 자녀를 먼저 보내야했던 부모의 마음은 모두 같다. 다만 그 표현의 투박함과 세련됨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작가는 일기를 써내려가면서 아들을 말하고 그 아들에 대해서 쏟아부은 자신의 사랑을 말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매우 엘리트적인 의식을 가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월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며 아들을 잃은 것과 동시에 그녀의 교만도 무너져 내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녀의 세상은 '나'가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작가를 자유롭게 한 것은 '나'를 '특별한' 위치에서 끌어 내리고 '우리 중의 하나'로 이해하면서 부터였다. '나' 중심의 생각과 삶이 딱딱한 돌멩이였다면, 하나님은 그녀의 생각을 '나'에서 '우리'로 바꿈으로 말랑말랑하게 하셨다. 불가능하다 생각하던 것이 바뀌어진 기적이었다.

시대를 뛰어넘고, 장르를 뛰어넘어 욥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메세지와 작가가 수녀의 입을 통해 들은 하나님의 메세지는 너무나 동일했다.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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