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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외침

미래목회연구소 느헤미야 2020-06-11 18:19:56

외침

루쉰. 외침. 루쉰문고 3. 공상철 역. 서울: 그린비, 2017.



저자에 대해서

루쉰(노신, 1881-1936)의 본명은 저우수런이다. 봉건의 압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대 중국에서 반제 반봉건의 문학운동을 전개했던 관계로 당국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1백 가지 이상의 필명 가운데 하나가 루쉰이다. 루쉰은 1902년 일본으로 유학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문학으로 중국인을 계몽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의대를 중퇴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간다. 1918년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아 Q정전」, 「쿵이지」, 「고향」 등의 소설과 산문시집 『들풀』, 『아침 꽃 저녁에 줍다』 등의 산문집, 그리고 시평을 비롯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요약

이 책은 루쉰문고 제3권으로, 다음과 같은 루쉰의 단편들을 소개한다. 「광인일기」, 「쿵이지」, 「약」, 「내일」, 「작은 사건」, 「두발 이야기」, 「야단법석」, 「고향」, 「아Q정전」, 「단오절」, 「흰 빛」, 「토끼와 고양이」, 「오리의 희극」, 「지신제 연극」

루쉰의 글은 저마다 낡은 사고에 갇힌 채 희적적 혹은 비극적인 웃음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회가 급변하던 시기에 중국의 혁명과 반혁명의 정치적-사상적 대립에서 민중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음을 더나아가서 오히려 민중들의 삶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피폐하게 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며, 지식들의 위선들을 고발한다. 아래는 각각의 작은 이야기들을 간단히 몇줄로 정리해 본다.

 

❖ 광인일기-누가 미친 사람인가?

 

소설 속의 주인공인가 주인공을 미쳤다고 몰아세우는 '정상인'들인가? 식인(食人)의 공포 속에 정신병을 앓고 있는 광인이 주인공이다. 다섯 살 때 죽은 누이동생도 형이 먹은 것이며, 자신을 먹으려는 자 또한 형이라 생각한다.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먹기 위해 작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중국의 봉건적 유교 사상과 정치사회체제를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체제에 비유한다. 오랫동안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로가 서로의 가해자임을 각성하게 한다.

"너희 고칠 수 있어. 진심으로 거쳐먹으라구! 앞으로 사람을 먹는 자는 용납치도 않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걸 알아야해. 당신들이 고치지 않는다면, 당신들도 전부 먹히고 말거야. 설사 애새끼를 줄줄이 낳는다 해도 참된 인간에게 멀절되고 말거야. 사냥꾼이 늑대 씨를 말리듯이 말야! 벌레처럼 밀이야!" (30쪽)

 

❖ 쿵이지-지식인은 그가 입은 옷과 말이 규정하는가?

 

쿵이지는 글공부는 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벌이가 없었고, 책을 베끼는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 하지만 그 마저도 게을리 한다. 책을 훔쳤을 때도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고 하며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며, 스스로 대단한 지식인 인양 있어보이는 어투로 말하지만, 실상의 삶은 하루를 벌어먹기 위해서 온갖 비도덕적인 행동들을 서슴없이 한다. 어느 날, 사람의 몰골이 아닌 채로 앉은뱅이가 되어 주점에 나타나 술 한사발을 들이키고 사라진 후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쿵이지는 선술 손님 가운데 유일하게 장삼을 입은 자였다. 훤칠한 키에 희묽은 얼굴 주름 사이론 상처자국이 끊이질 않았고 희끗한 수염을 덥수록하니 달고 있었다. 걸친 것은 장삼이라곤 하나, 땟국에 절고 너덜거리는 것이 십 년 정도는 빨지도 꿰매지도 않 듯싶었다. 말끝마다 '이로다, 하나니'를 달고 다니는 통에 듣는 이로 하여금 긴가민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기가 일쑤였다." (34쪽)

 

❖ 약-누군가의 피 위에서 서 있는 나는 당당한가?

 

가게를 하는 라오솬 부부는 사람의 피로 만든 만두가 폐병에 특효약이라는 소문을 믿고 사람의 피를 구해 아들 샤오솬에게 먹인다. 모두들 피로 만든 만두를 먹인 부모와 그 만두를 먹은 아들이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그들의 간절함과 용기를 칭찬했지만 아들은 얼마 안가서 폐병으로 죽게 된다. 아들이 먹은 피는 처형당한 혁명가의 피였다. 혁명가 샤위의 무덤과 샤오솬의 무덤은 오솔길 하나를 사이로 마주한다. 그리고 그 두 아들의 어머니들은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라오솬 부인은 그 무덤 안에도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 누워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둘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서로를 위로한다.

 

❖ 내일-인습에 머물러 있는 이에게 내일은 있는가?

 

세 살 된 아들과 함께 사는 과부 산씨댁은 중국식 의술의 잘못된 처방으로 제 때 아들을 치료하지 못했고 결국 아들을 잃었다. 무엇이 바른 방법인지 언제 그 방법을 써야 하는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우매한 지식인과 민중의 삶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음을 암시하며 과학적 지식에 기반 한 근대화를 계몽하고 있다.

 

❖ 작은 사건-누가 작은가? 그리고 누가 큰가?

 

경성 베이징에서 권력을 잡은 '나'는 어느 날 인력거를 타고 가는 중, 누군가가 인력거 채에 걸려 쓰러지는 사고를 경험한다. 그 일이 번거로워 질까 귀찮은 마음에 모른척하려 했다. 그러나 인력거꾼은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 주재소(경찰 지구대)로 갔다. ‘나’ 자신은 계몽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인력거꾼을 보면서 우매한 지식인의 모습을 갖고 있었음을 인식한다. 지식인에게는 '작은 사건'이었지만, 인력거꾼에게는 '커다란 사건'이었고, 작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을 알고 난후, 그 사건은 '나'에게 '큰 사건'이 되었다.

"이때 돌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쓴 그의 뒷모습이 순식간에 거대하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갈수록 점점 커져 우러러봐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나에게 대해서도 점점 위압적인 존재로 변해 가죽 두루마기 안에 감추어진 내 '소아'를 쥐어빠고 있는 것이 아닌가." (66쪽)

 

❖ 두발 이야기 & 야단법석-그들의 문자놀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던가?

 

두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는 변발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신해혁명 전 후 혼란한 시대에 살던 젊은 지식인들은 변발을 자르면 나라를 배신했다고 욕을 먹고, 자르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진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 시대에 이름은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평등과 자유를 쫓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지, 그리고 민족적인 자존감과 타민족의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중국 내의 사상과 정치의 논쟁이 '문자놀이'일 뿐이며, 민중들은 그 사이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고발한다.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긴데, 그때 애꿎은 백성들만 겁난을 당했다는군. 온 머리통이 머리털이면 관병에게 살해되고, 변발을 하고 있으면 장발적에게 살해되었으니 말이야!" (70쪽)

"장발적 그 난리 때 머리털을 남기자니 머리통이 달아나지, 그렇다고 머리통을 남기다지 또 머리털이 달아나지..."

 

❖ 고향-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어릴 때에는 함께 뒤놀던 친구가 신분제의 틀에 갖혀 어른이 되어서 만난 후에 자신을 향해서 "나으리"라고 불르는 고향에 진보가 없다며 한탄한다. 그러나 진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주인공 역시 '나으리'라고 부르는 어릴 적 친구에게 나으리 이상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그리고 환경이 만들어 놓은 친구의 미신적인 신앙을 비웃는다. 결국 '진보'라 스스로 생각하는 주인공은 관습의 틀 속에서 보건데, 생각만 진보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도 신분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까. 그러나 어린 시절, 신분의 질서를 뛰어 넘어 친구가 되었던 자신과 똑같이 조카 홍얼이 '나으리'라고 깎듯이 자기를 부르던 그 옛 친구의 아들 수이성과 친구가 되어서 서로 후일에 만날 수 있는가 물어보는 물음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한계와 또 다른 희망을 본다.

"몽롱한 가운데 바닷가 푸른 모래밭이 펼쳐져 있고 그 위 검푸른 하늘엔 노란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101쪽)

 

❖ 아Q정전-살아 남은 자가 정의다.

 

그러므로 최후의 승리자는 구경꾼들이다 아Q는 집이 없어 웨이좡 마을 사당에서 살며 일정한 직업도 없이 날품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지만 자존심은 강한 사람이다. 아Q에게는 자기를 기만하는 일종의 정신승리법이 있었다. 실제로는 얻어맞고 굴욕을 당할지라도 자신에게 유리하다 싶은 방면으로 생각을 고쳐먹고 마음속으로나마 자신이 승리했다고 스스로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는 곧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도 한때는... 너보다 훨씬 더 대단했어! 네깟 게 뭐라고!” (107쪽)

"아들놈한테 얻어맞은 걸로 치지 뭐. 요즘 세상은 돼먹지가 않았어...." (109쪽)

"조상 대대로 전해오는 ‘망각’이라는 보물이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했다." (117쪽)

    아Q는 혁명당에 가입한다. 그러나 생각의 혁신적인 변화때문이 아니라, 혁명을 자기를 괴롭힌 자들을 뒤집어엎을 도구쯤으로 생각하였다. 혁명당이 마을에 들어왔지만 처세에 능한 아Q의 적들도 재빠르게 혁명당에 가담한다. 즉, 혁명당이 입성하긴 했지만 마을 권력에 대한 대이변은 없었다. 권력자들은 이름만 바뀐 채 여전히 자리를 보전하고 있었다. 혁명이 있었으나 혁명 이후에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게 된 것이다. 혁명당과 관군 사이에 소요가 일어난다. 그리고 아Q는 총살을 당해 죽는다. 아Q는 그만한 일은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는 죽고 없으니까.

"여론으로 말하자면, 웨이좡에선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모두들 아Q가 나빴다는 거였다. 총살을 당한 것이 그가 나쁜 증거라는 것이었다. 그가 나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총살을 당했단 말인가? 그러나 도시의 여론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들 대다수가 불만이었다. 총살은 싹둑하는 것만큼(참수형) 좋은 구경거리가 못된다는 거였다." (160쪽)

 

❖ 단오절-세상이 그게 그거던가?

 

'그게 그거'라는 말을 즐겨쓰는 팡쉬안춰는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인물이다. 급변하는 사회를 경험한 팡쉬안춰는 언제라도 사람의 위치는 바뀔 수 있고, 바뀌어 지면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 뒤바뀔 수 있다.

"오늘날 사회에선 관료를 욕하는 게 유행처럼 되고 있는데 학생들이 더 심하게 욕을 하지. 그러나 관료라 해서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종족은 아니고 평민이 변해서 된거야. 지금은 학생 출신의 관료가 적지 않은데 나이 든 관료와 무슨 차이가 있겠다. '입장을 바꾸면 다 같은 것'이니 사상이나 언론, 거동이나 풍채에 무슨 커다란 구별이 있을 것이며..." (162쪽)

    대단한 인생 철학인 양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밀린 급료 때문에 살림은 쪼들리고, 어디 마땅히 변통할 방법도 없는데. 명절은 다가온다. 사실 인생은 그게 그거가 아니지만 애써 외면한다.

 

❖ 흰 빛-현실에 좌절한 이가 쫓는 허상

 

천스청은 과거 시험 합격자 방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했다. 16번째 도전한 시험에서 떨어진 것이다. 자포자기 상태에 있던 그는, 조상께서 집 어디엔가 은자를 묻어 두었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떠올린다. 그리고 흰 빛의 환영에 사로잡혀 집안 곳곳을 파헤친다. 그는 집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금이며 은이 내는 흰 빛 환상을 다라 다니다, 15리 떨어진 완류후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게다가 검시인의 증언으로는 산 채로 물에 빠졌다는 거였다. 물에서 발버둥을 친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열 손가락 밑에 강바닥 진흙이 잔뜩 끼어 있었던 것이다." (180쪽)

 

❖ 토끼와 고양이-누가 악마인가?

 

후원에 사는 셋째댁이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흰 토끼 한 쌍을 샀다. 강아지, 까마귀, 까치, 고양이까지 함께 하는 상황이 되었다. 토끼 한 쌍이 새끼를 낳았지만 그 새끼들을 고양이가 해쳤다고 그녀는 짐작한다. 이후, 그녀는 집착적으로 토끼굴을 파 자연스럽고 안전한 상태에 있던 토끼 새끼들을 모두 꺼낸다. 그리고 그녀의 시야에서 안전하도록 또한 공평히 어미젖을 먹도록 인위적으로 조정한다. 그리고는 고양이를 괴롭힌다.

"저 검은 고양이가 언제까지 담장 위를 거만하게 활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나도 모르게 책장 속에 감추어 둔 청산가리 병으로 눈길이 갔다." (187쪽)

 

❖ 오리의 희극-이론가의 뒷수습은 누가?

 

러시아인 맹인 시인 에로센코는 베이징을 사막에 있는 듯 적막하다고 호소한다. 그리고 그의 지론은 사람은 모두가 노동을 해야한다는 것과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는 개구리를 소리를듣기 위해서 올챙이를 사들였고, 오리도 사들였다. 그러나 그리고서는 홀연히 러시아로 돌아가 버린다. 남겨진 것들은 오롯이 베이징에서 그가 머물던 집 사람들의 몫이다. 혁명가들도 그랬다. 그리고 그들을 부추기던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그들은 떠났다. 뒷수습은 오롯이 남은 자의 몫이다.

"지금은 또다시 늦여름이 끝나고 초겨울이 시작되려 한다. 예로센코 군은 여전히 소식이 없다.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리 네 마리만이 아직도 사막 위에서 '꽥꽥' 울어 대고 있다."

 

정리하면서-지식은 도구이지 무기가 아니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이 유명한 말이 100년 전에 루쉰이 한 말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해준 책이다. 청나라 말기부터 중국 공산당 출범까지의 이십여 년의 기간은 중국 민중에게 절망적인 시기였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모습을 한 중국의 봉건적 유교 사상, 멀쩡한 젊은 남자가 제 밥벌이도 없이 열여섯 번이나 도전해야만 했던 과거제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데 변발이 유리할까 단발이 유리할까를 고민해야 했던 민중, 과학적이지 않은 치료와 처방으로 죽음을 맞게 되는 우매한 민중의 삶, 그게 그거라 생각하며 일신의 편리만 찾던 지식인의 삶, 그리고 이런 모든 사회적 악을 타파하고자 혁명을 했지만 권력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혁명을 사용한 기득권층, 혁명의 본질은 무엇이고 또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된 그 당시의 현실 등 대혼란의 시리즈물 같은 중국이었다.

    루쉰의 외침에 속한 소설들은 모두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는 중국인과 각성과 치료가 필요한 그 당시 중국의 사회적 상황을 보여 준다. 루쉰은 소설을 통해 그 당시 중국 민중 에 만연된 병적 현실을 드러내고 고민하게 했으며, 각성을 통해 계몽된 민중으로 새시대를 열어 가기를 희망했다. 대문호의 걸작이 그러하듯, 루쉰은 1920년대의 중국을 묘사했지만, 2020년의 지금 한국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달력만 넘어갔을 뿐, 얽히고 설킨 사회 현상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지금도 그대로이다. 그래서 루쉰의 글은 시대를 넘어 계속 읽혀진다.

    격변의 시기에 루쉰이 주는 메세지가 있다면, 지식은 도구이지 무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혁명가이던 봉건제도를 따르면 살던 사람이던 간에 루쉰의 눈에 지식과 지식을 준 권력을 가진 이들은 모두가 별반 다름없는 사람들이다. 물론 루쉰은 바뀌어지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선택했던 사람이지만, 적어도 당대를 살던 중국인들의 눈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봉건주의자들은 과거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혁명가들은 지식을 무기 삼아 민중들을 억눌렀다. 진보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사고와 민중을 대하는 방식은 새 시대의 탈을 쓴 봉건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고민없이 혁명의 물결에 올라탄 이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러고보면 루쉰은 가장 현실적으로 무기를 잡고 있는 두 집단, 서로를 몽둥이로 내려치기 위해 한껏 흥분해 있는 격변의 두 시대 사이에 낀 민중들의 마음을 글로 적어 내린 것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교인들 역시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있는 사람들이다. 목회자들은 두 세계 사이에 서 있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선택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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