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돼?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돼?
라즈 채스트.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돼? - 아흔 살 넘은 부모 곁에서 살기, 싸우기, 떠나보내기. 서울: 클, 2015.
저자에 대해서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유명 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의 만화를 1978년부터 그려왔다. 10여 권의 책을 쓰고 그렸다. 지금은 코네티컷에서 살고 있다.
요약
이 책의 제목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는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만 하면 회피하려고 하는 저자 라즈 채스트의 부모가 한 말이다. 사는 것이 바쁘고 정신이 없다는 매우 현실적인 핑계로 어린 시절 우울한 기억이 있는 집에 굳이 가고 싶지 않아서 부모를 거의 만나러 가지 않은 저자는 어느 날 부모를 찾아간다. 저자는 왜 갑자기 부모를 찾아 갔는지를 굳이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녀의 부모가 세상을 누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늘 깜끔했던 부모의 집 구석구석에 내려 앉은 더께(오랫동안 쌓인 먼지 떡지)를 보며 심상치 않은 전조를 느낀다. 그 때부터 정기적으로 부모의 집을 찾아가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평범한 일상이 무너져가는 부모를 목격하고 그들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 기록들을 만화로 담아냈다.
등장인물 (1) 어머니 엘리자베스 : “지금 내 뚜껑이 열리려고 해!”
전직 초등학교 교감인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흑백으로 분류하는 완벽주의자이다. 타인을 제압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적이 많은 스타일이다. 심지어 그녀의 딸인 저자의 적이기도 하다. '완벽하다'라는 말로 그 성격을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고집이 세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저자는 어머니로부터 어릴 적부터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랐고, 독립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어머니 엘리자베스의 잔소리('채스트로부터의 돌풍')가 시작되면, 아무도 살아 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부모의 집을 거의 찾지 않았던 이유도 성인이 되고 사회적인 지위까지 얻고 있는 자신에게 여전히 '채스트로부터의 돌풍'을 날리는 어머니와 부딛히고 싶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자기의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재단하지만, 정작 세상물정은 남편만큼이나 어둡다. 주방장갑까지 기워 쓰면서 은행에 저축하는 일밖에 모르는 여성이다. 자신을 과신하는 성격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도 넘어지는 사고도 잦다. 몸져 누울 때마다 시를 쓰는 예술적 감정을 가지기도 하였다.
등장인물(2) 아버지 조지 : “네 엄만 지금 어디 있니?”
박학다식하며 상냥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버지이다. 프랑스어 교사였던 아버지 조지는 성격이 매우 예민하고 소심하다. 그의 소화기관도 예민해 밥은 40번씩 씹고, 주스에 따뜻한 물을 타 마시고, 토마토나 오이도 안 먹는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운전도 하지 못하고, 기계라면 토스터기도 못 만지고 전구도 갈지 못한다. 저자는 아버지의 손재주 없음을 말하면서 제품 포장을 열 때도 너구리가 뜯어놓은 것처럼 해놓는 아버지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늘 아내에게 구박을 받긴 해도 아내가 없으면 극도로 불안해한다. 나이가 들면서 치매가 왔는데, 증상이 올 때마다 구닥다리 통장들에 집착해서 딸의 속을 뒤집어놓지만, 그래도 좋은 아빠였다고 딸이 기억해주는 사람이다.
등장인물(3) 외동딸 라즈: “우리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만화가인 라즈 채스트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유명 주간지 '뉴요커'의 만화를 1978년부터 그리고 있으며, 10여권의 책을 쓰고 그렸다. 순종적인 어린 시절을 악몽이었다고 기억한다. 부모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독립하였다. 그리고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않지만 9년간 부모와 제대로된 왕래도 없었다. 몸과 마음이 노쇠해가는 아흔 넘은 부모님을 내버려둘 수 없어서 다시 부모를 찾아가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부모들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고해 진다.
기력이 쇠하여지고 어제와다른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고령의 부모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준비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으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만을 꺼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지도 않는다. 죽음은 다른 세계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이다. 그러므로 섣불리 부모에게 죽음과 죽음 이후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을 이야기한다면, 매우 섭섭해 하거나 "도대체 왜 얘네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거야? 내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거야?"라며 불쾌해 한다.
그러면서도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몸이 약해가는 것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자신들이 점점 쇠약해져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건강하고 원기왕성하게 활동하는 그 자녀들에게 판단의 주도권을 내주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건강하고,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 할 수 있으며, 자신들이 아니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한다. 병치레하는 와중에도!
그럼,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 치료를 받는 것은 달가워할까?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일단 그들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사를 만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것은 컨디션이 일시적으로 좋지 않는 것이라고 현실을 부정한다.
혹, 자신의 건강에 이상 징후를 느꼈을 지라도 그들은 자신을 그 어떤 의사보다 뛰어난 의술의 소유자로 믿는다. 의사들을 불신하고, 그들이 확신하는 민간 요법을 고집한다. 의사들은 오히려 자신의 건강을 더 악화시키는 서양의 약을 주는 존재이다. 약은 먹으면 먹을 수록 내 건강을 파괴하기에 의사를 만나지 않고, 약을 먹지 않는 것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건강에 대한 확신을 이길 수 있는 자녀들은 없다.
검소함이라고 말하지만, 이전에 사용하던 오래된 것에 집착한다. 그리고 정리하거나 버리지 못하고 계속 쌓아 둔다. 그리고 과거를 선택적으로 기억한다.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그리고좋은 것만을. 이런 노인 부모들의 생각은 국가, 성별, 인종, 교육의 정도, 사회적인 지위를 막론하고 전 지구가 놀랍도록 동일하다~
너무나 솔직한 이야기
너무나 미국적이었던가? 부모와 9년간 왕래가 없었다는 것을 부끄럽지 않게 고백한 저자는 아버지의 치매와 어머니의 뜻하지 않는 사고 후에 그들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정기적으로 부모를 방문하고, 갑작스럽게 도움을 요청하는 부모를 찾아간다. 노인 전문 변호사도 만나 부모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준비할 것들을 정리하고, 본인이 직접 모실 수 없기에 요양원들을 알아본다. 또, 부모님 평생의 짐들도 정리한다.
저자는 부모들을 뒤치다꺼리 하는 것에는 끝이 없음을 불평한다. 그 가운데에도 스스로 딸로서의 자격없음을 괴로워한다.
상황이 역전이 되어서 부모들의 보호자가 되어야하는 것에 혼란스러워한다. 가족이 있는 집과 부모들이 살고 있는 브루클린을 오가면서 때로는 귀찮아하고, 때로는 빨리 부모의 집을 떠나고 싶어하고, 때로는 부모보다 아이들이 먼저라는 생각에 부모까지(?) 돌보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려는 머릿 속의 복잡한 속내를 숨김없이 만화로 드러낸다.
치매로 같은 질문을 매일 되풀이 하는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을 처음에는 이해하다가도 계속 반복되는 똑같은 질문에 불평하는 자신을 그려낸다. 치매의 가장 일반적인 증상을 겪는 아버지를 귀찮아하고 아버지 때문에 이중의 스트레스를 받았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했던 것까지도 담아낸다.
부모들이 모아 놓은 돈을 그들이 마지막을 머물게될 요양원 비용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그 돈들이 떨어지자 저자는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다. 점점 어머니의 상태가 안좋아 지면서, 요양원에서 받아야하는 추가적인 간호에 대한 부담감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솔직하다.
현실
죽음을 앞둔 부모와 부모를 부양해야하는 자녀들은 혈연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관계이지만, 그만큼 상처를 주고 받는 관계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늙은 부모와 이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도망치고 싶은 딸의 모습이 매우 현실적이다.
나이든 부모를 책임져야한다는 불안감. 돈은 떨어져 가는데, 언제끝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막막함이 머리를 짓이기고 있을 무렵, 갑자기 어머니의 건강이 좋아지는 듯한 싸인은 과연 감사해야할까, 아니면 그 반대여야 할까? 저자는 그런 상황의 당황스러움을 가감없이 묘사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담담하게 기술하는 이 만화를 읽으면서, 부모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인생의 큰 변화때문에 저자가 깊은 성찰을 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약간의 실망감이 있을 것이다. 저자가 가지고 있던 인생의 철학이 부모의 죽음으로 극단적인 반전하지도 않을 뿐더러,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며 그녀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부모도 마찬가지이다. 자녀와의 진지한 삶의 대화 없이, 그리고 극적인 화해도 없이 이별한다. 그런면에서 이 만화는 매우 실존적이라 말할 수 있다.
정리
커커스 리뷰(Kirkus Review)에서는 이 책을 "당장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실마리를, 지금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로를 주는 책"이라고 평가하였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 고집스럽게 과거의 삶을 고집하고 버려야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부모,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인 잣대로 생각하며 자녀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부모를 바라보면서, 이것이 죽음을 앞둔 나의 부모 만의 이상한 행동이 아니라, 죽음을 앞둔 세계 모든 부모의 공통점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지금 이 상황이 어찌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지만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한다는 부담감, 특별히 그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하고, 나의 집과 그들의 집을 오가야하는 육체적인 고단함, 그런데 아무런 감사도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잔소리만 들어야하는 딸. 무엇보다도 계속 돈이 들어가야하는 상황에서 부모가 이제 짐이라는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저자의 만화을 읽으면서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또한 죽음을 앞둔 나의 부모의 [어쩔 수 없는] 보호자가 되어버린 나 만의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동일한 상황에 처한 전세계 모든 자녀들의 공통된 감정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효(孝)라는 정서에서 '이것이 미국식 부모-자녀의 관계인가?'라는 조소와 함께, 대한민국의 부모-자녀의 관계도 많은 면에서 다르지 않다는 불편한 동질감을 갖는다. 한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는 식구(食口)로서의 가족이라는 말이 자꾸 떠오른다. 9년여 서로 왕래가 없었던 이 가족들에서 '식구'의 의미가 있었을까? 죽음을 앞둔 부모를 부양 부양하는 자녀들의 마음과 자녀의 미래를 만들어 가야하는 공동의 책임이 있는 부모가 자녀들을 부양하면서 느끼는 부담감과 무게감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연 부모들은 죽음을 앞 둔 순간에 "이제는 내가 자녀들에게 기대도 된다"는 생각을 갖는 가족을 만들었던가? 라는 질문들이 뒤죽박죽 솟아 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해 볼만한 인생 리스트들
-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기 (죽음을 마주하는 나의 마음을 정리하기)
- 배우자, 자녀들과 함께 식구(食口)로 살기
- 삶의 철학이 담긴 유언장을 작성해 보기
- 자녀들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나의 솔직한 감정을 감정적이지 않게 이야기하기, 그들의 이야기를 자기 합리화 없이 들어보기)
- 통장, 보험증권, 귀중품, 등기증서 등의 문서들을 잘 정리해 두기
-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 만큼의 경제적인 준비를 해보기
- 자연스럽게 죽을 권리에 대해 생각해 보기(연명기료나 기타 병원치료의 한계선을 정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