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파주:창비, 2019
저자에 대해서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에서 소수자, 인권, 차별에 관해 가르치고 연구한다. 현장과 밀접한 연구를 통해 사회에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법·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학자이다. 서울특별시립아동상담치료센터, 헌법재판소 등 기관에서 일했으며, 다수의 연구논문과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공저) <인권행정 길라잡이>(공저) 등을 썼고, <헌법의 약속>, <사회보장론 입문>을 옮겼다.
요약
이 책은 차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차별은 누가 하는 것이며 언제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차별에 대하여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대체로 ‘차별은 옳지 않다.’는 명제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차별이라 하는 것이 내 주변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미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인종 차별과 같이 역사적으로 이미 옳고 그름이 확정된 문제를 떠올린다. 그리고 나는 노예 해방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차별과는 관계 없는 건전한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차별이 ‘그때-거기’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차별을 당하기도 하고 가하기도 하는 양가적인 존재들이라고 규정한다. 나아가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무심코(악의 없이) 동의한 채 살아가고 있는 편견들을 지적하고, 변화의 두려움을 딛고 평등을 결단해 나갈 것을 촉구한다.
차별의 탄생: 고정관념과 편견
인간은 복잡하고 다양한 특성을 지닌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람을 바라볼 때 대상을 몇 가지 범주에 집어넣어 이해하려 하는 습관이 있다. 이때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범주에는 성별, 나이, 직업, 종교, 출신국가 등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 이러한 범주 안에서 '해석되는 나'는 누구인가? 남성-청년-공무원-기독교인-한국인인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여성-중년-주부-무슬림-미국인도 있을 수 있다. 고작 5개밖에 안 되는 단순한 범주들의 조합 안에서도 꽤 많은 집단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장애, 나이, 학력, 가족상황과 같은 범주들이 추가된다면 집단은 무수하게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차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럼 범주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범주의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구분 지으려는 관습 때문이다. 이 관습은 자연스럽게 ‘우리’와 ‘그들’로 구분 지어 준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시행했던 가을 운동회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운동회가 열리는 단 하루, 우리는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진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가 청군이면 ‘우리 편’이라며 응원을 하고, 이미 알고 지내던 친구도 백군이면 ‘남의 편’이라고 야유를 보낸다. 그리고 진심으로 우리 편은 우수하고, 남의 편은 열등하다는 믿음에 빠진다. 데이비드 데스테노(David DeSteno)와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난데없는 편견”이라 부른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속한 내부 집단은 복잡하고 다양하고 더 인간적이라고 느낀다. 반면 외부 집단은 훨씬 단조롭고 균질하며 덜 인간적으로 보인다. 내부 집단과 외부 집단의 차이를 과장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집단을 가르는 마음의 경계를 따라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만들어진다. -51쪽
그렇다면 누가 편견을 갖는가? 책의 저자인 김지혜는 ‘그들’에 대한 고정관념이 편견이 된다고 말한다. 고정관념은 대상에 대한 단순화된 정보이다. ‘한국인은 성격이 급하다’, ‘흑인은 검은 피부에 곱슬머리를 가졌다’, ‘베트남 여성은 생활력이 강하다’와 같은 말들이 이에 해당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정보를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의 특징을 '과잉 일반화'한 결과가 바로 편견이다.
고정관념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차별을 낳는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어딘가에서는 약자(을)가 되고 누군가에 대해서는 특권층(갑)이 된다. 내가 약자인 부분에 있어서는 사회의 부조리나 차별이 사무치게 느껴지겠지만(난민, 장애인, 유색인 등), 반대로 나에게 유리한 상황에서는 차별을 차별이라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국민, 비장애인, 백인 등). 이처럼 우리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모두가 다!
구조적 차별: 차별을 선택하는 사람들
차별은 사회 안에서 구조적인 문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의 직업과 임금에 대한 부분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의 ‘2016년 대졸자 직업 이동경로 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종(사회복지 및 종교, 보건의료, 문화·예술·디자인·방송, 교육 및 자연과학·사회과학 연구 분야)의 평균임금은 대체로 200만원에 미치지 못하는데, 남성이 절반을 넘는 직종(기계, 재료, 전기전자, 정보통신, 화학, 법률·경찰·소방·교도 관련직)의 평균임금은 대체로 200만원이 넘었다. 같은 직종에서도 남성에 비해 여성의 임금이 대체로 낮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하면서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상황으로 직관적으로도 부당한 차별로 여겨진다. 하지만 여성이 애초에 임금이 낮은 직종에 진출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어떤 면에서 여성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노동시장(위에서 말한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종들)에 자발적으로 진입한 셈이 되었으니, 여성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구조적 차별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74쪽
사실 여성이 특정 직종에 진출하기 전에 이미 사회 안에서 문화적 고정관념의 영향을 받는다. 가령 성차별적 문화가 강한 국가에서 ‘여성은 수학에 소질이 없다’라는 문화적 고정관념이 강하게 배어 있다고 치자. 그 사회 문화 속에서 여학생들은 자신의 능력을 저평가하고 수학 관련 진로 선택을 기피하는 경향성이 드러난다. 결국 이 고정관념은 상급 학교로 진학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고, 최종적으로 직업과도 연결이 된다.
그러니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전공과 진로의 ‘선택’이 과연 사회적 차별과 무관할 수 있을까?(중략) 여성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리한 조건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 조건에 맞추어 행동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는 차별적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74쪽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조적 차별을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이 각자의 선택이자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며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그것이 부조리하지 않나’라고 묻는 사람들에게는 예민하다고, 불평이 많다고, 그래도 세상이 많이 좋아지지 않았냐고 말하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좀 더 의구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과 상관없는가? 자연스러워보이는 사회 질서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은 없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나와 다른 집단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차별은 어떻게 차별이라고 인식되지 않는가? (1) 유머
유머는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많은 장점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비하나 조롱이 유머의 옷을 입을 경우, 그 유머는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굳게 잠겨있던 편견의 상자를 봉인 해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떤 집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더라도 보통의 상황에서는 사회규범 때문에 드러내지 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비하성 유머를 던질 때 차별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결과 규범이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편견을 쉽게 드러내면서 차별을 용인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 -88쪽
이때 저자는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차별은 어떻게 차별이라고 인식되지 않는가? (2) 능력주의
능력주의는 누구나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열심히 노력하면 높은 지위에 올라갈 수 있다."는 허구 때문에, 한 개인이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이유는 최선을 다하지 않은 그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덜 노력해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여러 가지 차별을 당연하다는 듯이 감수한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사실 정당하지 않을뿐더러, 한 사회의 양극화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 개인의 에너지 같은 자원을 투자해야 하는데 자녀의 실력 올리기 위해 부모가 투자하는 물질적·시간적 자원이 필요하다. 한 개인의 능력은 사실 그 부모의 능력이고, 그 부모의 능력은 또 그 부모의 능력이다. 능력이라고 부르지만 대대로 이어오는 유산과 같은 것이 능력이다. 재벌 2세, 3세가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 비즈니스 스쿨을 마친 후 아버지의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면 공정한 경쟁라고 할 수 있을까? 학벌과 경력이 만든 능력주의는 부자의 세습을 정당화할 뿐이다.
또한 저자는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어떤 능력을 중요하게 볼 것인지, 그 능력을 어떤 방법으로 측정할 것인지와 같은 판단은 이미 누군가에게 유리하고 누군가에게는 불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한국의 교육현장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학교가 학생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는 오로지 주요 과목의 점수다. 그 결과 공부를 잘하는 아이는 성실하고 똑똑한 사람으로 여겨져 교사의 신뢰와 관심을 받고,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 아이는 학업적으로 방치되거나 차별을 받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학업 성적이 높은 아이의 일탈은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한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잠시의 반항'이라고 부르고, 학업 성적이 상대적으로 낮은 아이의 일탈은 '원래 그런 아이의 탈선'이라고 부른다. 한 사회에서 선호하는 능력과 능력주의가 팽배한 사회구조는 그 능력이 있는 사람은 환호를 받아야 마땅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제되어도 상관없다는 고정관념을 구체화하고 있다.
차별은 어떻게 차별이라고 인식되지 않는가? (3)다수의 입장
저자는 사람들이 다수의 이름으로 배제하고 밀어내는 소수자들을 조명한다. 그들은 다수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존재들이다.
카페나 식당에서 영유아와 아동의 입장을 거부하는 ‘노키즈존’ 논쟁이 한참이더니, 중고등학생의 입장을 거부하는 ‘노스쿨존’도 나타났다. 아동은 소란을 피워 다른 손님의 이용을 반대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청소년의 입장을 거부한 카페는 청소년들의 무례한 언행을 문제 삼았는데, 청소년 여러 명이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오랜 시간 자리를 차지하는 일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121쪽
이러한 현상은 ‘노장애인존’이나 ‘내국인 전용’의 확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상당히 많은 사우나에서 외국인의 입장을 금지하고 있고, 경기도의 몇몇 어린이집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이나 외국인 아동의 입소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근거는 영업자가 지닌 ‘영업의 자유’다. 대한민국의 법에서는 대중시설의 주인이 인종이나 종교, 출신국가 등을 이유로 손님을 거부해도 아무런 규제가 없다. '개인의 자유'라는 멋진 슬로건 아래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영업자는 ‘다수의 고객이 기피하는’ 특정 집단이 있다면 그들을 자신의 영업장에서 배제해버린다. 저자는 이와 같은 차별의 역사가 어찌보면 사소한, ‘불쾌감’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노인과 아이, 장애인, 외국인과 난민, 성소수자 등을 바라보는 다수의 불쾌한 감정이 그들을 공공의 장소에서 밀어내고 배제한다는 것이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이 권력은 잘 쓰이면 매우 의미있다. (중략)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중략)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 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주류 집단이 누군가를 싫다고 지목함으로써 ‘낯선 것’을 솎아내는 판옵틱(panoptic)한 감시체제가 작동을 시작하고 공공의 공간을 통치한다. -143쪽
이에 저자는 “민주주의는 단순히 다수의 관점이 언제나 지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유럽 인권재판소의 주장을 인용한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해서 지배되는 사회 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그 땅에 살고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평등환 관계를 가지고 동등한 입장에서 토론하는 사회이다. 내가 다수일 때, 나는 누구를 배제하는가? 특정 집단에 대한 나의 마뜩찮음이 의분인지 혐오인지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이 나의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인 성향, 그리고 가치관, 개인의 안녕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복잡해진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언가를 혐오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입장을 고수할 것인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숙고이다.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
사람들은 자신이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기를 희망하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차별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매우 복합적이고 은근하게 일어난다. 우리가 차별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때로 우리가 내뱉는 습관적인 농담이나 용어 사용, 고정관념은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비록 교인일 지라도, 그리고 교회 공동체 일지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정말 결정해야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불평등과 차별을 직시할 용기가 있느냐는 것이다. 차별에 민감하거나 둔감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어떤 발언, 행동, 제도가 차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가? 내가 보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방어하고 부인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성찰할 수 있는가?” -188~9쪽
과연 나는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편견을 직시할 수 있을까? 내가 누리는 권리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그리고 내가 누릴 수 있는 일정 부분의 포기를 감수하고서라도, 차별과 편견이라 생각 되는 그것을 제거할 수 있을까?
때로는 이 책의 제목처럼 스스로를 매우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통과 문화, 그리고 공동체의 특수성이라는 이름으로 슬며시 들어와 자리 잡고 있어 그것이 차별이라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 바로 '선량한 차별주의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