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우아한 거짓말, 파주:창비, 2014
저자에 대해서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청소년 소설은 성인 문학의 아류로 취급당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청소년들의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며 문학성과 대중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작가 김려령은 그 선두에 있는 작가로, 장편소설 『완득이』로 2007년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 『완득이』는 출판시장에서 이례적인 성공을 거두며 영화와 연극, 뮤지컬로도 제작이 되었고 고등학교 교과서(고1 창비국어)에 부분 게재되어 있기도 하다. 이후 출간한 장편소설 『우아한 거짓말』 역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 2014년 영화로 제작되어 1백만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관람하였다.
요약
장편소설 우아한 거짓말은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주인공 '천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소설은 천지의 죽음을 추적하는 ‘만지’라는 인물을 통해 학교 폭력의 근간을 드러내고 있다. 만지는 천지의 친언니로, 천지가 죽은 후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동생이 남긴 붉은 실타래 속 쪽지를 발견하게 된다. 쪽지에는 자신에게 남긴 천지의 마지막 편지와 함께 총 다섯 개의 실타래가 존재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만지는 자신과 엄마에게 각각 남겨진 실타래를 제외한 나머지 3개의 실타래를 찾아 나서고, 그 과정에서 천지의 죽음에 화연과 미라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드러난 가해자, 화연
천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문제적 인물은 초등학교 때부터 천지와 어울렸던 친구 화연이다. 화연은 천지가 전학 오던 날에 처음으로 천지에게 친절을 베푼 친구였지만, 시간이 지나며 교묘하게 천지를 따돌리는 데에 앞장서게 된다. 화연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자리에서 천지가 술래를 도맡도록 상황을 주도하고, 천지가 없는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천지에 대한 유언비어를 흘리며, 천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아이와 친해지려고 하면 둘 사이에 껴서 관계를 갈라놓는다.
“천지 좀 빈티 나지 않냐? 아빠가 없어서 그런가?”
“쟤네 아빠 없어?”
“천지가 어렸을 때 죽었대. 자살했다더라.”
죽었다는 사실에 거짓을 섞어 진짜처럼 꾸며낸 이야기. 나에 관한 황당한 이야기의 시작에는 늘 화연이가 있었습니다.
“너하고, 절교야.”
“미안, 미안, 난 정말 그런 줄 알았어. 천지야, 미안해.”
발 빠른 화연이의 사과. 화연이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져도 상처는 내가 받았습니다. (21쪽)
화연은 악의적으로 천지에 대한 거짓 이야기를 퍼뜨렸다가도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친구들 앞에서 천지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여 상황을 모면하곤 했다. 그때마다 천지는 억지로 사과를 받아야 했고, 더 이상 상처 받은 티를 내지 못했다. 화연의 공개 사과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마땅히 표출되고 해결되어야 할 갈등을 대충 봉인해버리는 화연의 술수였다.
5학년 때, 화연이 생일날. 토요일 오후 3시. 보신각.
그날입니다. 화연이의 환한 웃음을 내 안에서 그만 지워버린 날이.
“너 왜 이제 왔어?”
“3시라고 했잖아.”
“아, 실수! 엄마, 얘 짜장면 하나만 만들어줘.”
옆에 앉은 미라가 자기 초대장을 슬쩍 펼쳤다 접었습니다. (중략) 2시. 보신각을 나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 했습니다. 그러면 화연이에게 놀림을 당했다는 게 사실이 되는 거였으니까요. (96쪽)
“2자를 쓴다는 게 또 3자를 썼나 봐. 천지야, 미안해.”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키득댔습니다. 아이들은 2시와 3시의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영악한 놀이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97쪽)
문제는 화연이 지닌 악의가 다른 친구들에게까지 전염이 되었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천지를 따돌리는 화연의 행동이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공론화하여 문제 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화연은 친구들로부터 ‘침묵’이라는 형태의 지지를 얻어 천지에 대한 괴롭힘을 지속하게된 셈이다.
화연의 경우, 처음에는 단순히 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따돌리다가 이내 자신의 노력에도 끝내 왕따로 전락하지 않는 천지의 존재에서 위기감을 느꼈고, 그로 인한 피해가 자신에게 돌아올까 두려워하게 된다. 결국 화연은 천지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천지를 집요하게 괴롭힌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화연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선물 공세를 펼치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데, 이러한 모습은 또래 안에서 주목 받음으로써 강자가 되고자 하는 화연의 욕구을 보여준다.
드러나지 않은 가해자들
화연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영향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권력욕구’가 강한 인물이다. 그러나 권력욕에 비해 천지나 친구들을 장악하지는 못하는 인물이었다. 친구들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화연은 친구들에게 선물 공세를 펼쳤다. 돈을 주고서라도 그들의 인정을 사고 싶어했다.
화연은 아쉽게도 영향력이 없었다. 화연은 시청자가 예상한 장면에서 예상한 효과음을 내주는 방청객에 불과했다. 가끔은 공감할 수 없는 장면에서조차 과장된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오히려 거슬리는 그런 방청객. 방청객은 무대 위 배우를 주도할 만한 막강한 영향력이 없다. (187쪽)
화연이 천지를 괴롭힌 가해자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화연의 행동을 지지하는 강화자들, 즉 다수의 친구들 때문이었다. 사미발리Samivali는 학교 폭력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 유형의 역할을 구분하면서 가해자, 조력자, 강화자, 방어자, 방관자, 피해자 등의 여섯 가지 역할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가해자: 적극적, 주도적으로 괴롭힘 행동을 이끌어가는 사람
조력자: 가해자의 추종자로서 가해자를 도와주는 사람
강화자: 가해자의 행동을 격려해주는 사람
방어자: 피해자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
방관자: 학교 폭력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피하는 사람
피해자: 학교 폭력에서 희생당하는 사람.
이때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존재하는 네 가지 유형의 인물들은 자신이 선택한 입장에 따라서 능동적 또는 수동적으로 학교 폭력에 관여한다. 반 친구들은 대부분 화연의 의도를 알면서도 천지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이를 방관하거나 도리어 화연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학교 폭력의 강화자이거나 방관자가 된다.
자극적이고 일방적인, 쥐를 코너에 몰아넣고 빙빙 돌리는 고양이식의 놀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킬킬댔던 잔인한 구경꾼들. 화연은 구경꾼들이 식상하지 않도록 점점 더 강도를 높여야 했다. (175쪽)
방관자와 강화자는 가해자의 행동을 격려함으로써 학교 폭력에 참여하고 있지만 피해자에 대한 책임감은 크게 느끼지 않는다. 작품 속 학급 친구들 또한 천지가 목숨을 끊은 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지속한다. 죄책감은 그저 화연의 몫이다. 화연은 천지가 죽은 후 자신에게 동조했던 반 친구들에게 외면을 당한다. 사실은 모두가 가해자인데도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죄
우아한 거짓말에는 천지를 괴롭히는 화연의 행동에 대하여 어떠한 문제의식도 갖지 않고 침묵하는 학급 친구들뿐 아니라, 화연의 행동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직접적으로 화연을 막지는 않는 미라가 등장한다. 천지가 죽기 전부터 화연의 괴롭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미라는 평소에 화연의 따돌림을 방해하고 천지에게 호의를 베푸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미라는 천지의 방어자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천지는 미라의 행동 또한 방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뭐 하냐?”
미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손하고 눈이 쉬는 날이 없다니까. 뭘 만드는데 이렇게 길게 짜?”
“쓸데가 있어서.”
“수행평가 그거, 선전포고지? 보기 좋게 실패했고.”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확인.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한 거드름.
“김화연한테 그게 먹힌다고 생각해? 걔 그거 안 통해.”
그럼 어떡할까? 곽미라 넌, 공범자는 되기 싫고, 멋진 구경은 하고 싶은 거야. 그렇지?
“애들이 김화연 좋아서 같이 다니는 줄 아냐? 만날 먹을 거 사주니, 노래방비 다 내지, 극장 가면 팝콘을 쫙 돌린단다. 봉이야 그냥.”
하하하. 가만 보면 남들도 다 아는 사실을 저만 아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사실은 남들보다 덜 알고 있습니다. (125-26쪽)
엄밀히 말해 미라는 화연의 행동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 모든 것을 알면서도 화연이의 비열함을 지적하지도, 천지의 친구가 되어주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미라의 마음 깊은 곳에는 천지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아픈 엄마를 두고 천지 엄마를 다라다니며 구애하는 자기 아빠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라는 천지의 방어자가 아니라, 천지에 대해서는 철저한 방관자였다.
“너, 나한테 말 안 한 거 있지?”
“…….”
“있어, 없어!”
“없어, 언니. 진짜야, 진짜 없어. 나는 그냥…….”
미라는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냥 뭐?”
“누구 하나 죽어야 정신 차린다고. 화연이는 누가 죽어야 정신 차릴 애라고, 발표 따위로는 꿈쩍도 안 할 애라고. 그냥 한 말이었는데……. 잘못했어, 언니…….” (156쪽)
결과적으로 미라가 던진 마지막 말은 천지가 목숨을 끊기로 결심하던 날 천지의 가슴에 깊이 꽂힌다. 결국 학급 친구들과 미라는 ‘주도하거나 부추기거나. 지켜보거나 눈감거나 상황을 즐기거나 어떻게든 하나가 된 아이들‘로 남게 된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청소년 소설이며, 학교 폭력을 소재로 삼고 있으나, 이들의 삶은 어른들의 삶의 축소판이며, 동시에 거울이다. 물리적 공간이 학교일 뿐, 학교 담장너머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관계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학생들과 다르지 않다.
학교 폭력을 연구하는 송민경은 학교 폭력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과 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네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권력장악가능성이 크고, 권력장악욕구도 큰 사람은 ‘지배자’다. 둘째, 권력장악가능성은 크지만, 권력장악욕구가 작은 사람은 ‘실력자’다. 셋째, 권력장악가능성은 작은데, 권력장악욕구가 큰 사람은 ‘추종자’다. 넷째, 권력장악가능성도 작고, 권력장악욕구도 작은 사람은 ‘은둔자’다
폭력을 주도하는 지배자이든,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하는 실력자, 추종자, 또는 은둔자이던 간에 모두가 가해자이다.
그러고보면,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갔던 ‘과거의’ 제사장과 레위인과 함께 비난 받아야할 사람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으며 가해자를 비난할 뿐, 조력자, 강화자, 방관자나 다름없이 살아가는 ‘현재의’ 성경 독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