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
저자에 대해서
저자 래리 허타도Larry W. Hurtado는 1943년생.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교 신약 언어, 문학 및 신학 명예 교수. 사복음서 및 신약성서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에든버러 대학교 신학대학원장(2010년), 동 대학 기독교 기원 연구센터 소장(2011)을 지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지난 수십 년간 탐구해온 주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시기”라고도 칭하는 서기 1~3세기 초기 기독교인들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요약
허타도는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초대 교회를 소개하고 있다. "초대 교회"라는 말은 매우 모호한 말이기도 했는데, 저자가 인용하는 로마의 역사가들의 대부분이 1세기 말, 그리고 대부분은 2세기에 활동했던 역사가 이므로, 이 책에서 말하는 초대 교회는 특별히 2세기의 교회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2세기 로마 제국 안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사형 언도를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로마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가?
1. 규칙적으로 경건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
로마인들은 "정해진 새벽에 만나 그리스도 예수를 노래하는 자들"로 기독교인들을 이해하였다. 2세기 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기독교가 박해를 받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나, 동시에 규칙적인 경건의 삶과 그들의 경전에 근거한 기독교인들의 삶의 방식이 높게 평가받기도 했다.
2. 철학이 아니라 삶의 종교
로마의 철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보면서 철학이 없다며 조롱하였다. 그리스-로마 철학과 같이 체계적인 사상의 기반이 없어보이는 것과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죽은 자의 부활과 같은 허황된 이야기는 로마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평가절하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조롱과 관계없이 로마의 역사가 갈레노스 Galenos 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인들에게는 없는 "용기", "절제", "정의"의 미덕을 가진 이들이며, 그렇게 산다고 평가하였다.
첫번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여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의 짐을 나눠지고, 살림이 궁핍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필요를 채워주는 삶을 살았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삶의 태도는 오늘 만을 사는 로마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된 삶이었다.
두번째, 기독교인들은 성도덕 논리에서도 근본적으로 로마의 성도덕과 다른 길을 걸었다. 로마인들 사이에서 너그럽게 용서되었던 혼외정사, 매춘부나 정부, 노예와 맺는 성적 관계, 유부녀와 관계를 맺는 간통, 그리고 동성과의 성관계 및 소아와의 성관계 등 적법한 결혼 관계를 넘어 벌어지는 성관계들을 거부하였다.
세번째, 기독교인들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치며, 남의 소유를 탐하거나, 위증을 하지 않았다. 겸손하며 분열보다는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들이었다. 주인에게는 심지어 노예를 다스리는 법을 지시하며, 노예들에게 가혹한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귿르은 남녀의 구별, 사회 계층의 구별없이 모든 신자들에게 올바른 규범을 가르치고 촉구했다.
3. 로마의 신들을 거부하는 사람들
2세기의 기독교인들은 여러 신들을 숭배하는 제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이웃들로부터 고립될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신들을 "우상"이라고 불렀는데, 이 "우상"이라는 그리스어는 "허깨비"라는 뜻으로 로마의 신들을 실재하지 않은 허깨비로 규정하였다. 로마 제국의 질서는 신들의 계급과 질서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의 신들을 허깨비로 규정하는 것은 로마인들의 입장에서 로마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였다.
신전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을 하던 로마는 경제 질서의 붕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유일한 한 신만을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유대교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대교는 그들만의 종교였고, 원래부터 로마 신전의 경제 활동 구역 안에 있지 않았기에 로마 사람들에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또 로마의 시민 누구를 유대교로 전도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달리 로마 사람들에게 로마의 신들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이들이었다. 이방인 선교를 통해서 로마의 귀족들도 하나둘씩 기독교인이 됨으로 로마의 신전 경제에게 멀어져갔다. 이런 상업적인 위기감은 초대 교회를 탄압하는 사회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4. 세상과 어울리며 다르게 사는 사람들
로마 사람들의 문화 가운데에서 오늘날 독자들이라면 충격적으로 생각하는 풍습 중의 하나는 '영아 유기'이다.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정식으로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갓난 아기를 버려도 법적인 책임을 묻거나, 도덕적인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런 아이들은 죽거나, 간혹 누군가에 의해서 길러져도 노예로 팔려나갔다. 2세기 로마 제국은 연간 50만명이 넘는 새로운 노예가 필요했는데, 이중 15만명 가량은 유기된 아기를 노예로 길러서 충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남자이던 여자이던 간에 사창가에 팔려 나가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인들은 '영아 유기'를 하지 말아야할 범죄 행위로 규정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유대교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인들은 폭력적인 검투사 경기도 마찬가지로 반대하였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검투사 경기나, 콜로세움과 같은 검투사장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그 폭력을 부적절한 행위로 생각했을 뿐 더러, 사회적인 행동 양식을 바꾸려는 목적의식 아래에서 공개적으로 거부의사를 밝혔다.
나라, 언어, 의복과 음식을 비롯해 여러 생활 양식에서 해당 지역의 관습을 따르면서도 그들의 독특한 가치관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지녔다는 자부심은 기독교인들을 "세상과 어울리며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고통스럽게 갈등을 빚게 되는 대상은 로마 제국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가족과 친구, 지인들이었다.
4. 책의 종교
로마의 종교와는 달리 유대교를 포함한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모두가 회중 예배 때에 유대교의 경전을 읽었다. 기독교는 그 경전에 바울의 편지나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편지, 또는 그들의 글들을 더해 읽었다. 후일, 기독교 안에서 예수와 관련된 글과 편지들이 정경화되면서, 유대교 보다 더 많은 글들을 회중 예배 때 읽게 되었다. 문맹자들 역시 예배 때 대표로 성경을 읽는 사람의 낭독을 들음으로 책과 일치될 수 있었다. 이 편지와 글들은 계속 사람들의 손에 필사되어서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글을 읽고 다시 옮겨 적어서 다른 지역의 공동체와 회람하는 전통은 로마의 제의와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유대교와 비교해서도 차별되게 많은 기독교 변증 서신과 글들을 남기고 필사하며 다른 지역으로 전파하는 초대 기독교의 독특한 문화는 글과 책의 종교라 불리는 것을 잘 설명해 준다.
허타도가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의 삶을 모두 재구성하지는 못하였다손 치더라도, 기독교가 아닌 로마의 역사가들의 눈에 비친 초대 교회 공동체의 다름을 보여줌으로,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는데 있어서 이 책은 매우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