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러 온 예수 죽이러 온 예수
죽으러 온 예수 죽이러 온 예수
김경집, 죽으러 온 예수 죽이러 온 예수 - 교회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9
저자에 대해서
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예술철학과 현대사회철학을 공부했다. 서강대학교에서 시작하여 가톨릭대학교 인간학교육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뒤 계획했던 대로 25년만에 학교를 떠났다. 인문정신은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미래 의제를 끌어내는 바탕이라는 신념은 다양한 책을 썼다. "인문학은 밥이다"(알에이치코리아, 2013) 외에 "김경집의 통찰력 강의"(동아시아, 2018)등 인문 서적과 여러 에세이집 등 청소년과 청년을 위한 책, 더 나아가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시공사, 2013)이라는 종교 서적도 썼다.
요약
이 책은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김경집이 여러 곳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모음집이다. 친절하게 책의 맨 뒤에는 그 글의 출처까지 밝히고 있다. 전부 34개의 글꼭지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글꼭지를 몇줄로만 정리해도 그 양이 방대하다. 그 중에서
30 종교를 욕되게 하는 자들을 물리쳐라!
31 교회에서 가짜 뉴스를 쫓아내라!
32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의 세 개의 글꼭지는 저자의 카톨릭 및 카톨릭 신문에 대한 비판이 담긴 글이므로 생략하였다. 그러나 카톨릭 및 개신교 모두에게 공동으로 해당되는 쓴 소리는 그대로 요약해서 담아 내었다.
01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과 가인의 차이는 부끄러움을 아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차이이다. 아담은 비겁했지만, 결국 그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았다. 그러나 가인은 끝까지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서 당당했다.
02 사랑의 측은지심이다
포도주가 떨어져 버린 잔치의 신랑은 포도주를 넉넉하게 준비하기 어려웠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그 혼주의 마음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명분이나 대의를 말하지 않고 그런 하찮은 일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소명은 하나님의 자녀됨의 본질이 측은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고 보여주시려 하였기에 그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03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사랑이다
교회를 "자산"으로 여긴다면, 백날 사랑을 더들어도 최소한의 조건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 조차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이건 복음이건 실컷 이야기해도 공염불일 뿐이다.
04 우리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교인들은 스스로 동방박사 중의 한 사람, 목자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그 여관 방에서 묶고 있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이미 돈을 냈기 때문에 따뜻한 방에 묶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요셉과 마리아에게 방을 내어주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 우리가 있다.
05 본질적인 것은 단순하다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낭비를 한다. 심지어는 우리가 내뱉는 말조차도 말이다. 고난의 상황에서는 단순해져야한다. 단순하고도 꼭 필요한 삶에서 울림이 있게 마련이다. 울림이 바로 공명이고 공감이다. 이것은 결핍이 주는 선물이다. 가득하면 울리지 않는다. 단순해질 일이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지속적인 욕망이다. 욕망으로 가득채우지 말고 단순해져야 한다.
06 비판은 최고의 대안이다
비판은 자신들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소리가 아니라, 최고의 대안을 찾기 위한 첫 걸음이다. 예수님은 비판하셨고,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들을 귀'가 없었다. 비판의 힘이 현실에서 장점으로 드러나려면 먼저 그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혜안과 겸손이 필요하다. 없다면 복음도 힘을 쓸 수 없다.
07 겁과 비겁사이
겁이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겁'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건이다. 비난을 받을 것은 '비겁'이다. 가장 비겁한 사람은 힘을 가지고 약자에게 잔혹하게 구는 사람이다. 그리고 비겁한 사람은 악마를 따르는 사람이다.
08 용기와 두려움
용기 있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때 추한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추한 대담함에 대담하게 굴지 않는다. 용기가 필요한 일에 대담함을 보이는 사람이 진정 용기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무서워해야할 것과 무서워하지 말아야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에서 참된 용기가 비롯하는 법이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간 상태이다. 두려움과 비겁은 다르다. 정조(1752-1800)는 두려움을 알아야 크게 실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두려움을 아는 것"이란 스스로 정한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주절하여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라 규정했다.
09 60대를 성찰하다
60대는 의무의 삶에 대해서만 배웠지, 권리에 대해서는 제대로 배워보지 못한 세대이다. 젊었을 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때 나는 어떤 열정과 사상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되살려내야 한다. 그게 진짜 회춘이다. 권리의 삶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을 어떤 의무의 강박이나 부담 없이 작게나마 실현해보고자하는 욕망이 지금 60대들이 누려야할 특권이다.
10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을 얻어야 (광군제 vs 빼빼로 데이)
기업을 운영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이익 증진에만 몰두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게 향유할 미래 가치에 투자하는지, 사람을 아끼고 품으며 노동자나 소비자와 공감하는지를 물어야한다.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을 얻어야 오래가고 끈끈하다.
11 강자가 앞장서라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의 진출한 뒤, 축구협회는 선수들에게 기여도에 따라 포상금을 다르게 지급하려고 했다. 그 때 빛을 발한 것이 선수들의 연대의식이었다. 선수단이 협회의 제안을 거절하고 모든 선수에게 동일한 포상금을 지급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축구협회는 처음에 선수단의 요구를 거절했다. 하지만, 선수들이 포상금을 모아 공평하게 나누겠다고까지 하자 결국에는 자신들이 내세웠던 원칙을 포기했다. 설ㅇ므을 토로하는 것은 약자의 몫이지만 그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지지함으써 부당한 대우와 억압의 사슬을 끊도록 돕는 것을 강자의 몫이다.
12 행운과 불운은 누구의 몫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원전한 자급자족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운'에 뿌리를 둔 성공을 말하는 이들 역시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내 돈으로 공장하나를 지었다 칠 때, 누군가가 낸 세금으로 건설한 도로를 통해 시장으로 상품을 운반하고, 누군가가 낸 세금으로 가르친 직원들을 고용하고, 누군가가 낸 세금으로 유지하는 경찰과 소방관의 도움을 받아야한다. 내가 낸 세금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도움없이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는 행운으로만,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운으로만 작동되는 사회에 교회가 합류해서는 안된다.
13 인구절벽과 IMF
역사는 되풀이 된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역사의식을 함양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시간(역사)의 흐름 속에 깔린 '인과관계'를 성찰하고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시키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역사를 이용해서 악한 아이디어를 내는 이들도 있다. 교회의 역사도 그렇다. 교회사를 공부해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일들일 비일비재하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구어낸 긍정과 부정의 역사를 공부해야만 지금 교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를 용감하게 타파해 갈 수 있다.
14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인가
세계는 이제 자본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 있다. 노동은 신성하다. 그러나 그 신성함이라는 말을 누가 주로 쓰고 있을가? 노동의 신성함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이다. 진정으로 노동이 신성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은 야만이다. 노동의 가치를 순수하게 인정하고 그에 걸맞는 대가를 주어야한다 (15장과 연결하여)
15 학교와 교회에서 노동의 법과 권리를 가르쳐라
노동은 한 존재의 근거이자 삶의 방법이다. 우리 나라도 이미 많은 사람이 학생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나 노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교회의 성도들도 대부분이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교회의 설교에서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노동'이라는 말만 나오면 곧바로 '좌'라는 딱지를 붙인다. 성도들은 노동을 통해서 복음을 믿음을 실천한다. 그런데 그 노동의 현장에서 노동이 왜곡되거나 억압되거나, 착취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해야할가? 교회도 노동에 관한 법을 충실히 공부하고 실천해야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삶에 공감해야한다.
16 앞으로 100년, 그리고 100년
학교 교육이 획일적이고 관리 중심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학교에서 교복을 선호한다. 그리고 부모들도 교복을 선호한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말 중의 하나는 사복을 입을 경우 지나치게 명품을 선호하여 빈부 격차의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모를 중시하는 어른들의 명품 선호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다는 점은 왜 아무도 반성하지 않을까? 사실 교복을 처음으로 다시 입기 시작한 것은 이른바 명문학교들이었다. 그런 학교들은 미국의 사립학교에서 입는 듯한 교복을 도입했다. 그러면서 교복이 우리 나라를 다시 덮쳤다. 그 반대로 평판이 좋지 않았던 학교들이 먼저 교복을 입었다면 과연 교복의 유행이 있었을까? 그릇된 어른들의 눈으로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의 삶을 재단하거나 통제하지 말아야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계 제도와 예배의 형식을 조금 풀었다고 했다. "열린 교회", "열린 예배"라고 말할 수 없다. 교회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17 어른들이 깨어나야 한다
한국의 남자 어른들은 무언가 서로운 감정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누리는 물질적 혜택들이 모두 자신들이 일궈낸 것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이룩한 성과를 내세우며 젊은 세대가 자신들을 공경해주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들은 솔직히 그 경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해서 자신이 비겁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한다. 그러므로 노장년층의 사람들은 공부해야한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한 거지?""라고 묻고 분노하며 고백해야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서 싸워야한다. 교회라고 다를 것이 있는가?
18 늘 깨어 있으라
진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보수적 가치가 토대를 이루어야한다. 올바른 보수의 토대가 없으면, 그 토대 위에서 반동적으로 튀어 오르는 진보 역시 건전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태도가 드러나는 곳이 종교의 영역이다. 이 영역이 인간의 도리나 예의, 염치 등의 가치 및 민주주의와 정의, 자유와 연대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변화되는 사회에서 "꺼삐단 리'처럼 행동한다면 교회라고 심판에서 비켜 갈 수 없다. 교회가 수구 세력의 온상이며 못자리라는 비판에 직면하기 전에 스스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19 어른들은 청년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오늘의 청년들은 공정의 가치에 관심을 갖는다. '갓(God)뚜기'라 불리는 오뚜기가 청년들의 칭찬을 받는 이유는 지금의 회장이 1,500억원에 이르는 상속세를 납부했고, 대형마트 시식 코너에서 그 기업의 제품을 홍보하는 2,000여명의 직원을 모두 정규직으로 채용했으며, 심장병에 걸린 어린이들의 치료를 오랫동안 조용히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경제적인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직률 또한 높지만, 급여가 조금 불만족스럽더라도 자존감을 키워주고 미래의 희망을 분명하게 제시한다면 언제라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교회에서도 '쉐도우 커미티' Shadow Committee 를 만들어야한다. 교회 평신도 리더들과 공유한 것들을 청년들과도 똑같은 방식으로 공유하며 권한의 일부를 양보하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해야한다. 그것이 새 시대를 여는 방식이다.
20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몸에 나병이 있는 열명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한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권리를 되찾아 정상적인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을 받으라는 뜻이었다. 예수님은 그냥 몸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온전한 인격체로 회복시키셨다. 이 부분이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책감이나 미안함 동정심도 없이 글자에 얽매여 믿고 아픈 이들에게 못을 박는 일을 태연하게 자행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회적 금기와 기피에서 벗어나 인간을 온전한 인격체로 대해야함을 보여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사회가 규정한 율법과 어긋나는 지점이 있더라도 사람이, 사랑이 최우선이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사장들에게 무딘 심장을 도려내라고 우회적으로 당부한 것이기도 했다.
21 야만과 폭력
'다수'를 방패삼아 우위를 점유하고 타인을 비난하거나 공격할 권리는 없다. 그러나 '다수'가 '소수'를 차별과 무시할 때, 21세기 야만과 폭력이 시작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름'과 '틀림'을 구별해야한다. "양심에서 다수결의 원칙은 설 자리가 없다"는 간디의 말을 되새겨보자. 교회는 양심에 따라서 소수를 감싸 안아야한다. 그리고 때로는 다수의 앞에서 신앙의 양심을 따라서 '아니오'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22 사사의 타락
헌법이 권력자들에게 유린당하는 것처럼 교회법도 무시당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힘을 가진 이들이 교회법의 조문을 가지고 장난을 하는 온갖 유린 행위가 있음에도 결국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사사기는 하나님이 권위를 주셨지만, 그 권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판관에게는 재앙이 내렸다. 왜냐하면, 권위를 가진자의 비극은 공동체의 비극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23 모차르트를 들으며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는 구체제를 더받치고 있는 모든 것, 곧 귀족, 재판, 권위, 외교 등에 대해 조롱을 퍼붓는다. 그는 사회적 불평등, 무능한 자가 향락을 만끽하고 다른 편에서는 유능한 자가 고통 속에 빠져 있는 불평등에 대해 항의한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귀족 등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다. 사실 모차르트가 바보여서 돈 줄을 끊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귀족층이 아니라 신흥 중산층들의 편에 섰다. 그들이 자신의 작품에 기꺼이 돈을 댈 줄 알았다. 그러나 중산층을 상대로 자신의 작품이 충분히 소빟될 것이라고 믿었던 모차르트의 바람은 현실과 어긋났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현실적 생계와 적당한 사치를 위해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해야했다. 이것이 모차르트가 많은 곡을 쓴 이유이다. 결국 과로로 이른 나이에 죽는다. 기득권을 상대한 모차르트의 혁명은 순수했던가? 가치가 있는가?
24 시대를 알아 보아라
교회의 힘은 복음 정신의 선포와 그 실천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바탕은 예언자 정신에 뿌리를 둔다. 예언자는 시대 정신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비판한다. 그의 예지력이 멸망할 미래를 수렁에서 건져낸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런 예언자의 역할을 일찌감치 포기한 듯하다. 교회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악마와도 기꺼이 손을 잡을 듯한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다. 오늘 필요한 교회의 상은 시대 정신에 대한 고민을 하고 미래 의제에 대한 복음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교회이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부어야하는 것처럼 새 시대에는 새로운 모습의 교회가 필요하다.
25 다시 시편을 읽으며
시편은 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하고 하나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어떻게 재대로 살아야하는지를 긴 호흡으로 다지는 주제로 일관한다. 시편이 일관되게 노래하는 것은 거짓에 휘둘리거나 아부하지 않고 정의의 훼손에 분노하며 의연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담뿍 받는 내가 따라야 할 의무요 의미라는 사실이다.
26 우리는 어떤 거울을 가지고 있는가
SNS는 우리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그러나 그 거울은 나를 비추기 보다는 왜곡된 정보를 비추어 사람들에게 보이기도 한다. 인터넷이 민주주의를 촉진한다는 것은 신화이다. 사이버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미명으로 새로운 형태의 수탈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인터넷과 SNS에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적 측면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제대로 감시하고 경계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민주주의를 오히려 저해한다. SNS의 사회를 그럼에도 더 활성화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두려운 마음으로 비합리성과 부조리를 정리해야한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교회의 부패와 타락, 비합리성과 부조를 알면서도 인터넷이나 SNS에 고발하기를 꺼린다. 그러나 "아직은" 그럴 뿐이다. 세상에 끝까지 숨겨질 일은 없다. 그러므로 숨길 일을 만들지 않고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27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교회는 병원, 학교, 보육원, 양로원, 요양원 등을 운영한다. 그 목적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복음을 실천하고 전파하는 동시에 신자들에게 양질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교회가 그런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에 대해 많은 성도가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다양한 시설들이 과연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복음적 가치를 실현해내고 있는지 거듭 물어야한다. 성전에서 예수님은 상인들을 책망하고 쫓아내셨다. 성스러운 공간에서 "장사를 했다"고 막무가내로 화를 내며 야단치고 엎어버리신 게 아니다. 사장이 갈수록 탐욕의 눈을 뜬 사람들에게 큰 이권 사업으로 변질되어 갔기 때문이다.
28 탐욕을 경계하라
화려함을 자랑하는 온갖 조각물과 그림들이 엄청난 규모의 교회 안팎을 채우고 있는 이유는 당시에 문맹이 많은 까닭이었다. 말과 글로 가르쳐야할 것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려니 화려함과 웅장함이 극치를 이루는 방식이 추구되었다. 흔히 고딕 양식을 하늘을 향한 신심의 상징으로 하늘로 치솟는 높은 상승감의 표현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 실상은 각 도시의 경제적, 정치적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속물근성에서 비롯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타락의 임계점은 자각하기 어렵다. 바티칸은 마음에 드는 성당을 짓기 위해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다. 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무리수도 마다치 않았다. 이른바 면죄부가지 발행할 정도로 돈에 혈안이 되었다. 가뜩이나 교회와 성직자들의 타락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29 도덕을 실천하지 못하는 교회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선하고 공정하다고 느껴지는데, 조직 안에서는 경쟁적이다 못해 폭력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율 배반이다. 그런 사람을 직접 겪으면 누구나 절망하고 분노하게 된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는가? 아마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일 수도 있다. 니부어 Reinhold Niebuhr 는 이성과고학의 시대에 팽배하던 순진한 낙관주의에 도전했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처방전으로 제시한 것은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도덕적인가? 니부어는 신학자답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교회의 노력을 강조한다. 도덕적 교회로 거듭나기를!
33 품고, 기다리고, 함께 살며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참 행복하고 정겹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이들과 담을 맞대며 살고 싶어 한다. 함께 산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모두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지니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던 제자이다. 왜 다른 제자들은 그런 도마를 비난하거나 탓하지 않고 오히려 품어주었을가? 그것은 부활의 확인이 준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활의 소식은 도마의 투정과 의심조차 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 배운 만큼 기본적으로 동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34 본회퍼를 기억하라
오늘날의 교회는 고도비만이다. 신구교를 막론하고 한국교회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는 근본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다. 둘째는 지나치게 성직자 중심적이다. 셋째는 여전히 서구 중심주의적인 사고다. 성직자들은 예언자는 없고 제사장만 난무한다. 예언자이길 포기한 독일의 교회는 히틀러의 동조자가 되었다. 그러나 본회퍼의 신학은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삶의 실천으로 드러났다. 그는 예언자이다. 흔히 교회가 사회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말하며 교회의 중립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자가 성직자에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사회가 타락했을때,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이 그 타락에 일조했거나 자신의 낮은 도덕성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지 못할 때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끝.